동학군 전주성 점령서 청일전쟁까지 긴박했던 62일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2월 7일 11시 05분


[특집] 두 갑오년 1894년과 2014년…그리고 한반도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원색 판화첩 ‘우키요에'에 실린 ‘조선경성 오토리공사대원군 
호위’라는 제목의 그림. 동학군 진압을 구실로 파견된 일본군이 오토리 공사 지휘아래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불법 난입하는 
장면이다. 천안박물관 제공
청일전쟁의 일본 승리를 선전하기 위해 제작된 원색 판화첩 ‘우키요에'에 실린 ‘조선경성 오토리공사대원군 호위’라는 제목의 그림. 동학군 진압을 구실로 파견된 일본군이 오토리 공사 지휘아래 흥선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불법 난입하는 장면이다.
천안박물관 제공
갑오년인 1894년 5월 31일(양력).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무혈 입성했다. 2월 전라도 고부에서 첫 봉기를 일으킨 뒤 4개월 만이다. 전봉준은 전라감사 집무실인 선화당을 손쉽게 접수했다. 무능한 조정과 부패한 관리들에 대한 민심 이반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선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모신 경기전과 전주 이씨 시조 위패를 모신 조경묘가 있는 곳이다. 더구나 전주성 함락은 곧 동학군이 서울을 향해 진격해올 수 있다는 것을 뜻했다.

6월 1일 긴급 대신회의가 열렸다. 병조판서 민영준이 '청병(淸兵) 차용'을 적극 주장했다. 임오군란(1882년)과 갑신정변(1884년) 때와 같이 '청나라 병사를 잠깐 빌려 일단 급한 불을 끄자'는 것이었다. 민영준은 당시 조선 조정을 좌지우지했던 청나라 사신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와 짬짜미 관계였다. 청병 문제에 대해 둘은 찰떡궁합이어서 진즉부터 돌발사태에 대해 준비하고 있었다. 위안스카이는 그의 상관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李鴻章)에게 '청군의 즉각적인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건의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이홍장은 임오군란 처리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24세의 젊은이 위안스카이를 통해 10년간 조선을 움직였다.

고종은 2일 청나라에 파병을 공식 요청했다. 청일전쟁의 인계철선이 당겨진 순간이다. 청일 양국은 갑신정변 처리과정에서 '조선의 변란으로 군대를 파병할 때는 상대방에 통보한다'는 톈진조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일본은 이미 조선이 청나라에 군대를 요청한 정보를 쥐고 있었다. 이튿날인 2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총리대신도 내각회의를 열고 조선 출병을 결정했다. 일본이 갑신정변 이후 내실을 다져온 지 10년 만이다.

메이지(明治) 유신에 성공한 일본은 1873년에 징병제를 도입하고 1878년에 육군참모본부를 중심으로 육군을 개편했다. 1880년대 들어서는 함정 현대화에 주력했다. 이때 전신 전화 우편제도 철도 등도 함께 정비했다. 이종호 건양대 교수(군사학)는 "일본은 1881년부터 1990년까지 10년 동안 매년 세출대비 군사비를 20~30% 이상 배정했다"고 말했다.

일본 육군참모본부는 1887년에 이미 '청국정도책안(대청 전쟁계획)'을 만들어 놓았다. 당시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1885년 시사신보(현 산케이신문) 사설에서 주창한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이 힘을 얻고 있던 시기였다. 탈아입구론은 조선과 중국을 접수하고 아시아를 넘어서서 구미 열강에 들어가자는 논리로 동아시아 패권 추구의 정신적 근거였다.

조선의 출병 요청을 받은 청은 6일 북양함대를 출동시키고 일본에 통고했다. 그러나 일본은 하루 전인 5일 전쟁사령부인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했다. 또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공사를 귀임시키면서 병력 400명을 태워 출항시켰다. 갖출 것 다 갖춰서 한꺼번에 출병하면 청보다 이틀이나 늦는다는 점을 고려해 선수를 친 것이다.

청의 병력은 8일 충남 아산에 2000명이 도착하고, 오토리 공사의 배는 9일 인천에 입항한다. 오토리는 다음날 야포 4문과 함께 병력 400명을 이끌고 서울에 입성한다. 일본은 곧이어 혼성여단 병력 7000명도 출동시킨다.

양국 출병 사실을 알게 된 동학군과 관군 사령관인 홍계훈은 10일 전주 화약(和約)을 서둘러 맺는다. 청일 두 나라 군대를 조선에서 철병시키려는 의도에서다. 주 내용은 '동학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하고, 홍계훈은 동학군의 신변을 보장하고, 27계 폐정개혁안을 임금께 올린다'는 것이다.

조선 조정은 즉각 철병을 촉구했지만 일본은 거부했다. 오래전부터 조선 침략을 염두에 두고 단행한 파병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주둔 핑계가 군색해지자 청나라에 "양국이 조선의 내정개혁에 착수하자"고 제안하고는 버틴다. 이후 25일 각국 외교단까지 나서 공동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청국도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7월 21일 1300명의 병력을 아산으로 추가 파견했다. 일본은 7월 20일 조선 조정에 경부 전신선 가설권, 조선과 청이 맺은 조약 폐기 등을 요구하면서 "22일까지 답하라"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러고는 7월 23일 새벽 조선 왕궁을 점령한다. 이어 25일 아산 풍도 앞바다에서 청 함대를 공격하고, 29일에는 충남 성환에서 육상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다.

자신감이 붙은 일본은 8월 1일 청에 공식적으로 선전포고를 한다. 명분은 '독립국 조선국 보호'였다. 여기까지가 동학군의 전주성 점령을 빌미로 조선에 출병한 일본이 청일전쟁 개전까지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인 62일간의 기록이다.

윤명철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는 "청일전쟁은 해양 세력인 일본의 대륙진출의 서곡"이라며 "이후 동북아는 물론 전 세계가 요동쳤다"고 말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윤양섭 전문기자 laila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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