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두 갑오년 1894년과 2014년…그리고 한반도
1894년 당시 조선이 받아들인 서양 문물 돌아보니
"개항 이래 외국상품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값이 매우 쌌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상인들이 많은 이득을 보았다. 수년이 안 되어 일본인들은 시세의 흐름에 맞춰 물건을 팔았는데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많은 이익을 취했다. 10종의 외국화물이 반입될 때 그중 9종이 인조품인데 비해… (중략) 수입품은… 음교(매우 교묘함)하고 기사(속임수가 비상함)한 물건이며…."(황현의 '매천야록'에서)
"이 미약한 독립왕국은 지금, 반쯤은 경악하고 전체적으로는 멍한 상태로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오고 있다. …이 왕국은 한 손엔 으스스한 칼을, 다른 한 손엔 미심쩍은 만병통치약을 든 낯선 세력에 휘둘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봉건적 문화가 지배하던 한국 사회가 근대로 발걸음을 옮겨가는 갑오개혁의 해, 1894년 한국에는 외국문물이 얼마나 들어와 있었을까. 황현의 기록처럼 이 땅에 외국 상품과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개항 이후다. 개항 18년 후 1894년에는 영국인 지리학자 비숍(1831~1904) 여사가 한국을 답사했을 때 외제품을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한국시장이 열리다
한국은 1876년 일본에 문을 열어준 뒤 1882~1886년에 미국 청(淸)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등에 문호를 개방했다. 개항과 함께 한국은 약육강식의 자본주의 물결, 즉 강대국의 상품과 문화가 밀려오면서 일대 전환기로 빨려 들어갔다. 개항장 내에서만 허용되던 외국상권은 1882년 임오군란 후 중국 상인이 서울에 점포를 낼 수 있게 되면서 확대되었다. 서울역사연구가 박경룡의 책 '개화기 한성부 연구'에 따르면 1884년 서울에서 중국 상인 352명이 48개 점포에서 일하고 있었고, 1890년 서울의 일본 상인은 625명이었다. 외국 상인들의 진출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짐작할 수 있다.
비숍은 1894년 한국 모습을 소상히 기록했다.(그녀의 답사는 1897년 초까지 계속된다) 그녀의 눈은 외국문물이 들어오던 한국의 모습, 특히 시장 풍경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서양문명과의 전혀 원치 않았던 접촉 때문에 압박감을 느끼는 서울'을 보았다. 부산에서는 셔츠천, 풀을 먹인 한랭사, 모직물인 모슬린 등의 외제 물품이 한국인을 사로잡고 있는 풍경을 기록했다. 비숍이 1894년 봄에 매일 여러 종류의 증기선이 부산에 들어왔다고 전하는 것으로 볼 때 이 배들을 통해 수입품들이 들어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일본우편선박회사의 배들도 부산항에 꽤 많이 기항하는 것을 보았다. 오스트리아인 에른스트 폰 헤세 바르텍(1854~1918)도 여행기 '조선, 1894년 여름'에서 일본의 증기선이 14일마다 부산항에 들어온다고 했다.
외국 상권이 슬금슬금 커져갈 때 한국 상인들이 묵묵히 쳐다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타격을 입은 한국 상인들, 특히 서울의 육의전 등의 상인들은 1887, 1890, 1898년에 조직적인 시위와 철시로 항의를 표시했다. 다만, 이런 시위가 서구 열강의 문물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통신과 운송이 이어주는 사회
근대적 통신 시스템은 1882년 우편 전신을 취급하는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되고, 1884년 설립 며칠 후 갑신정변으로 폐지됐던 우정총국이 서울~인천 간 근대 우편을 선보이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1885년 서울~인천에 전신이 개통되고 전국에 전신선로 개설이 잇따랐다. 비숍은 우편 전신 업무와 전신선로를 여러 차례 기록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중에 전국의 전신선로는 크게 파괴되었다. 갑오개혁이 진행되던 1895년에는 농상공부에 통신국을 두었다.
중국에 기술 유학을 떠났던 상운(尙澐)이 1882년에 귀국하면서 전화기 2대를 가져왔지만 실제 통신에 사용되지는 않았다. 1894년 일본에서 전화기를 들여와 궁중에 설치하려는 시도에 이어 1898년에는 궁중과 중앙관청에 전화가 개통됐다. 1895년에는 자전거가 들어왔으며 1899년에 전차가 운행되고 1900년에 경인철도가 놓여졌다.
●금융장악 강자는 일본
상업적 이윤이 발생하는 지역의 중심에 금융기관이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에는 근대적 금융기관의 침투내용이 잘 나와 있다. 일본은 개항 직후 1878년에 부산에 일본 제일국립은행 지점을 개설했다. 그 후 이 은행은 원산 인천 서울로 영업망을 확장해 나갔다. 일본은 1880년에 쓰시마 이즈하라의 제102국립은행, 1890년에 나가사키 제18국립은행, 1892년에 오사카 제58국립은행의 출장소 또는 지점을 한국에 개설했다. 홍콩상하이은행과 차타드 뱅크가 인천에 진출하기도 하였다.
제일국립은행은 한국의 재정자금을 운용해 화폐발행권을 장악해 나가면서 일본금융의 한국지배를 실현하는 역할을 한다. 고종은 근대적 화폐제도를 수립하려는 열망이 있었는데 이와 관련해 일본은 갑오개혁을 틈타 자국 화폐를 한국의 법정화폐로 만들고자 하였다. 비숍은 은으로 만든 엔화가 유통되는 현장을 기록했고 달러도 유통된다고 밝혔다. 이 시기 일본 청 독일로부터 들여온 수십 건의 차관 중에서는 이율이 연12%인 것도 있었다. 외국 차관 도입은 증세 부담을 높였고 민중들의 반외세항쟁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옷 음식 생활용품에 분 외제 바람
청일전쟁 직전 수입의 절반은 면제품이었다. 비숍은 1894년에 수입된 한국의 면제품 중 40%가 일본산이라고 전했다. 그녀의 고국인 영국산 면제품이 일본산에 밀리는 것을 서운해 한 듯하다. 갑오개혁은 의복 간소화로 대표되는 복식 혁명의 시발점이기도 했다. 비숍은 고종의 거둥(擧動·임금의 행렬)에서 유럽식 옷을 입은 기병들을 보았다. 당시 관료들의 모자에도 외국스타일이 스며들었고 외국어학교 학생들은 양복을 입었다고 한다. 육군은 옛 군복을 버리고 구미식의 제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여기서 소설 '토지'의 한 장면. 작품 속 최치수의 재종형인 조준구는 갑오개혁기가 지난 후 시골에 내려왔을 때 전형적인 신식 복장을 하고 있었다. '검정빛 양복에 모자, 구두를 신은 서울의 신식양반'인 그는 농촌을 편 가르는 가장 속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갑오개혁기에는 외국의 음식 문화도 상당히 유입된 것으로 보인다. 상류층은 양식과 중국 요리, 술을 즐겼고 해외서 들어온 과자와 가공식품에도 맛을 들였다. 비숍은 젊은 양반 사이에서 양주가 퍼져가는 것도 기록했다. 임오군란 직후 서울에서는 중국 군인과 중국인들이 들여와 즐겼던 호떡이 찐빵 만두와 함께 퍼져나갔다. 우동 단팥죽 어묵 단무지 초밥 사탕 등의 일본 음식도 이미 소비되고 있었다.
비숍이 꼼꼼히 기록한 1894년 서울의 상점에는 외제 물품들이 많았다. 등유램프, 손거울, 번쩍거리는 그릇, 일제 루시퍼성냥, 염료 등이 그것이다. 여주 지역 관료의 자제 집에서 프랑스식 시계, 독일식 거울, 미국산 담배, 벨벳 덮개를 깐 의자 등을 보고 값싸고 번지르르한 외제품에 대한 열광이 돈 있는 젊은 멋쟁이들 사이에 번져가고 있다고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그녀는 원산의 도로를 수입가죽, 외제 셔츠천, 시계 등 다양한 물품이 흐르는 상품의 이동로로 보았다.
건축에도 외국 양식이 등장했다. 당시 서울에 있는 여러 외국 공관들은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었다고 한다. 비숍이 그해 서울의 성벽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벽돌로 지은 영국 공사관 건물이었다. 러시아 공사관의 높은 탑과 화려한 정문도 보였다. 한편 1880년대 지은 인천 대불호텔, 배재학당, 명동 천주교주교관 등은 당시 대표적 외국 건물이었다. 1884년에 인천에 지은 독일인들의 사택 세창양행 건물은 최초의 양옥으로 이름을 날렸다. ●과학문물을 일찍 받아들였더라면
1881년에 한국은 중국에 기술 유학생을 파견했다. 김윤식이 이끄는 유학생들은 톈진(天津) 기기국에서 공부하다 아쉽게도 임오군란으로 귀국이 앞당겨져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 일본에 파견된 박정양 홍윤식을 필두로 한 신사유람단은 일본의 신문물을 접하고 돌아와 개화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883년 미국에 보낸 보빙사 사절단은 방직공장 철도회사 등을 시찰하고 돌아왔고, 그 직후에 우정국을 설치하고 경복궁에 전기를 설비했다.
1886년에 개교한 육영공원에서는 과학기술 교육을 선보였다. 미국인 교사들은 영어 외에 산학(算學) 만물격치(萬物格致)도 가르쳤지만 대중교육기관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미국에 보빙사로 갔던 최경석(?~1886)은 타작기 등 농기구 18종을 구입해 돌아왔다. 변수도 1891년 미국 대학에서 농학을 공부하고 졸업했으나 국내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서재필은 미국 의과대학을 졸업했지만 귀국해서 의사로 활동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흐름과 인물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갑오개혁 시대까지 외국의 과학기술이 한국에 전파된 사례는 미미하다. 그 후를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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