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때 봅슬레이에 출전한 강광배 선수(현 국제봅슬레이스켈레톤경기연맹·FIBT 부회장)의 경기를 TV로 봤다. 한눈에 봅슬레이의 매력에 빠졌고 그해 대표 선발전에 나갔다. 당시 성적은 4위로 그리 뛰어나지 않았지만 타고난 운동신경 덕분에 빠르게 기량이 늘었다. 체중도 쉬지 않고 불려 나갔다. 몸이 무거울수록 가속도가 많이 붙어 유리하기 때문이다. 하루 8끼를 먹었다. 위가 견디지 못해 음식을 게워 내기 일쑤였다. 더 힘든 것은 찌운 살을 근육으로 바꾸는 일이었다. 숟가락 놓기가 무섭게 혹독하게 근육 훈련을 했다. 2010년 77kg이던 체중이 107kg으로 늘었다. 날씬할 때 찍은 여권 사진과 실제 모습이 달라 출입국 심사 때마다 곤란한 일을 겪었지만 내심 흐뭇했다.
대학에서 체육교육을 전공했고 체육교사가 되기를 희망했던 원윤종(29·경기연맹)은 올림픽 출전을 위해 몸도 바꿨고 꿈도 바꿨다.
#2 2006년 동계체육대회 쇼트트랙 고등부 남자 1000m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체대 2학년이던 2008년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에서 종합 3위를 차지했다.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그해 동계체육대회에서 왼쪽 발목이 부러진 이후 긴 슬럼프를 겪었다. 한번 다친 발은 수시로 그를 괴롭혔다. 경쟁에서 뒤처진 그가 다시 앞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남보다 더 많이 훈련하는 것이었다. 연습을 마치고 나면 발은 벌겋게 부어올랐다. 곳곳에 생긴 굳은살이 혹처럼 커졌다.
땀은 배신하지 않는 법. 2012년 동계체육대회에서 2관왕에 오르며 올림픽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이상화 모태범 이승훈 등 대학 동기들보다 훨씬 늦었지만 마침내 태극마크를 달았다.
‘올림픽 출전’이라는 목표가 있었기에 이한빈(26·성남시청)은 힘든 시간을 견딜 수 있었다.
#3 1994년 중학교 1학년 때부터 폴(Pole)을 잡았다. 지구력이 남달리 뛰어났던 그는 2년 뒤 출전한 동계체육대회에서 정상에 올랐다. 이후 출전할 때마다 우승을 휩쓸며 17차례 동계체육대회에서 모두 51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크로스컨트리의 여왕’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녔지만 국내용이었다. 2002년부터 출전한 3차례 올림픽에서 거둔 최고 성적은 45위였다. 운동을 시작한 뒤로 1주일 넘게 쉬어 본 적이 없는 그는 2010년 결혼해 2012년 5월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코치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해외 전지훈련까지 소화하다 출산 1개월 전에야 임신 사실을 밝혔다.
지난해 1월 딸을 낳은 이채원(33·경기도체육회)은 ‘엄마의 자존심’을 걸고 소치에 갔다. 30위권 진입을 노리고 있지만 진정한 목표는 올림픽을 통해 비인기종목 크로스컨트리를 국내에 알리는 것이다.
▼ “메달을 못따도, 꼴찌를 해도, 그대 당당하게 웃어라” ▼
선택받은 자, 당신은 올림피안(Olympian)
2014 소치 겨울올림픽의 성화가 타올랐다. 2010년 밴쿠버의 영광과 감동 이후 4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이 시간을 땀과 노력으로 가득 채운 71명이 소치에서 한판 승부를 준비하고 있다. 올림픽은 수많은 국제대회 가운데 최고의 권위를 누리며 전 세계인의 관심을 받는 꿈의 이벤트. 그 무대를 밟도록 허락받은 극소수의 선수들을 우리는 올림피안(Olympian)이라고 부른다.
미국올림픽위원회(USOC)의 13대 위원장인 짐 셰어(2003∼2009년 재임)는 선임 당시 첫 올림피안 출신 위원장으로 화제가 됐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그는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단순한 선수 출신이 아니다. 정확하게 올림피안으로 불러 달라”고 주문했다. 레슬링을 하며 두 차례 월드컵 챔피언을 차지했고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은 2, 동메달 1개를 땄던 그는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출전했다.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자부심은 대단했다.
미국의 명문 사학들은 전통적으로 스포츠를 중시했다. 1896년 그리스 아테네에서 열린 최초의 근대 올림픽 첫날 세단뛰기에서 미국에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 준 제임스 코널리는 하버드대 재학생이었다. 이 대회에 미국은 14명의 선수를 파견했는데 이 중 12명이 하버드 등 ‘아이비리그’ 출신이었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는 것이 당연한 미국에서는 선수 출신 명사가 무수히 많다. 셰어 역시 네브래스카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명문 경영학석사(MBA) 과정으로 꼽히는 노스웨스턴대 켈로그스쿨을 마쳤다.
하지만 엘리트 중심의 체육 정책을 고수해 온 한국은 올림피안보다 올림픽 ‘메달리스트’, 그중에서도 금메달리스트들만 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왔다. 금메달을 따면 매달 100만 원(은메달 75만 원·동메달 52만5000원)의 연금을 평생 받는다. 이번 소치 겨울올림픽의 경우 금메달을 딴 선수는 6000만 원(단체 4500만 원)의 포상금도 받는다.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혜택이다.
훈련비도 메달 가능성이 높은 종목에 많이 배정된다. 메달 가능성이 낮은 종목일수록 메달과 가까워질 수 없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존재하는 게 한국 엘리트 스포츠의 현실이다. 올림피안이라는 사실만으로 자부심을 갖기는 쉽지 않다.
반면 미국은 태릉선수촌 같은 대규모 훈련 시설이 없고 메달에 따른 포상제도도 없다. 올림픽에 참가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일 뿐이기에 엄격한 선발 과정을 통과해 올림피안이 된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영광이다.
최근 들어 국내에서도 ‘1등 지상주의’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수영 박태환, 여자골프 박인비, 리듬체조 손연재의 ‘멘털 코치’인 조수경 박사(조수경스포츠심리연구소장)는 “승패가 갈리는 스포츠의 본질상 결과를 중시하는 것은 당연하고 1등이 주목받는 것을 없애자는 것도 옳은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결과 못지않게 ‘과정의 가치’도 존중하는 쪽으로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올림피안은 과정에 충실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지위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는 메달 획득 여부와 상관없이 올림피안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존중과 격려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게 조 박사의 설명이다.
▼ 23위, 19위, 25위 기록했던 이효창 선수 있었기에… ▼
1948년 생모리츠부터 2014년 소치까지
한국이 태극기를 앞세워 처음 출전한 올림픽은 여름 대회가 아닌 1948년 1월에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개막한 겨울 대회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이다. 1946년 대한올림픽위원회를 발족시킨 한국은 1947년 제41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정식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한국은 ‘KOREA(당시 표기는 COREE)’라는 이름을 내걸고 나간 첫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나라를 되찾은 기쁨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한국의 첫 올림피안은 생모리츠 대회 스피드스케이팅에 출전한 이효창 문동성 이종국 3명이다. 그중 1944년 전일본선수권대회 종합 우승, 1946년 춘천에서 열린 제1회 한국빙상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한 이효창이 한국의 간판 선수였다. 이효창은 500m 공동 23위, 1500m 19위, 5000m 25위를 기록했다. 세 종목 모두 40명이 넘는 선수가 참가했으니 첫 출전치고는 나쁜 성적이 아니었다. 1960년 스쿼밸리(미국) 대회 때는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김경희 한혜자가 한국 겨울 종목 첫 여성 올림피안으로 이름을 남겼다. 1992년 알베르빌(프랑스) 대회 스피드스케이팅에서 김윤만이 사상 첫 겨울올림픽 메달을 딴 것을 신호탄으로 한국이 ‘겨울올림픽 아시아 최강국’으로 우뚝 선 것은 비인기 종목 선수라는 설움 속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했던 선배 올림피안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948년 3명에 불과했던 태극마크의 겨울 올림피안은 2014년 71명으로 늘었다.
1924년 프랑스 샤모니에서 제1회 겨울올림픽이 열렸을 때 참가국은 20개국, 선수는 376명, 대회에 걸린 금메달은 17개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대회도 커졌다. 소치에는 88개국에서 역대 최대인 2873명의 선수가 참가한다. 경기의 수(금메달 수)도 98개로 역대 최다이다. 이전까지는 2010년 밴쿠버 대회의 82개국 선수 2577명이었다.
한국은 소치 대회를 포함해 지금까지 17차례 겨울올림픽에 출전했다.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66년 동안 겨울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는 연인원으로 따져도 382명에 불과하다. 2회 이상 대회에 나간 선수가 꽤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제 겨울 올림피안의 수는 크게 줄어든다.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의 ‘맏형’ 이규혁(36·서울시청)은 6차례나 올림피안의 영광을 누렸다. 겨울 대회에서 이규혁보다 많이 출전한 선수는 이번에 7번째 올림피안이 된 스키점프의 가사이 노리아키(42·일본)뿐이다.
역대 겨울 올림피안 가운데 메달을 딴 선수의 비율은 얼마나 될까. 1924년 1회 샤모니 대회부터 2010년 21회 밴쿠버 대회까지 참가한 선수는 연인원 기준으로 1만8542명이다. 그중 색깔과 상관없이 메달을 얻은 선수는 3339명으로 전체의 18%다. 2차례 이상 출전한 선수들을 감안해도 20%에 못 미친다. 아이스하키나 계주 같은 단체 종목에 걸린 메달은 각각 금·은·동 하나씩이지만 엔트리에 포함된 선수는 모두 메달리스트가 된다.
한국은 금메달 23개를 포함해 역대 겨울올림픽에서 모두 45개의 메달을 획득했다. 메달리스트로 이름을 남긴 선수는 39명이다. 밴쿠버 대회까지 출전했던 연인원 311명 가운데 이들을 제외한 약 87%의 선수가 메달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크로스컨트리의 여왕’ 이채원은 2002년 솔트레이크시티 대회를 시작으로 4회 연속 올림픽 무대를 밟는다. 매번 최하위권에 머물며 메달 근처에도 가지 못해 큰 좌절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해 엄마가 된 그는 후배들의 거센 도전 속에서도 힘든 훈련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나 올림픽에 출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올림픽 레이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스포트라이트는 메달리스트들을 향할 것이다. 하지만 메달을 따지 못해도, 꼴찌를 해도 기죽거나 슬퍼하지 말라.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웃으라. 오직 노력과 실력만으로 당당하게 세계 최고의 스포츠 축제에 출전한 올림피안은 그럴 자격이 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들이 별처럼 밝게 빛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경쟁자가 바로 올림피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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