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대표 선수로 24년 동안 짊어져온 의무와 책임을 모두 내려놓은 날 이규혁(36·서울시청)에게는 남겨진 일이 있었다.
12일 밤(현지 시간) 그는 메달 수여식이 열린 올림픽 파크 메달 플라자를 찾았다. 이상화(25·서울시청)의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500m 금메달 시상식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그는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의 모습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상화는 중학생 때부터 그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다. 그도 기꺼이 이상화의 멘토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사실 이규혁은 이상화가 걱정됐다. 올림픽 2연패의 부담감에 모태범(25)과 이승훈(26·대한항공)이 메달 획득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규혁은 “다행히 내 걱정은 기우였다. 상화는 부담감을 잘 넘겼다. 이제 ‘나보다 더 훌륭한 선수구나’라는 존경심이 들 정도다. 이런 것을 보고 청출어람이라고 부르는 것 같다”며 웃었다.
모태범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는 “이번 올림픽에서 태범이는 혼자 너무 많은 짐을 짊어졌다. 2연패에다 남자 대표팀의 간판스타라는 점은 태범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큰 부담이었다”고 말했다. 모태범의 4년 뒤 재도전에 대해 그는 “얼마나 어려운 결정을 내렸는지 올림픽에 6번 출전한 내가 잘 알고 있다. 지기 싫어하는 태범이의 오기가 발동한 것 같다. 내가 조언해 줄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13일 이승훈의 방을 찾아갔다. 그는 “5000m 경기가 열리는 날 경기장으로 가는 승훈이를 봤는데 얼굴이 완전 굳어 있었다. 큰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 내 눈에 보였다. 이번에는 어려운 경기가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규혁은 이승훈의 어깨를 다독이며 얘기했다. “승훈아. 아직 너에게는 1만 m와 팀 추월 경기가 남았으니 빨리 마음을 다잡았으면 좋겠다. 너는 5000m에서 12위를 했으니 1만 m도 12위 수준일지도 몰라. 그럼 이제 올라갈 일만 남은 것 아닌가? 밴쿠버 때와 같으니 그 마음 다시 떠올려 봤으면 좋겠어.”
그는 마지막 레이스를 마친 뒤 “이제는 운동을 더 해도 우승 후보가 아니다. 목표의식이 없다”며 “메달도 없으면서 올림픽을 통로로 스케이트를 계속 했다. 그래서 즐거웠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 올림픽에서 선수들이 부진했던 이유는 심리적인 부담감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4년 뒤에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내가 비록 은퇴를 하지만 후배들을 위해 할 일이 많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선수로서의 그의 경기는 끝났지만 후배들을 위한 그의 경기는 이제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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