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나는 다시 김홍걸을 불러 “너는 대통령의 아들이기 때문에 조금만 처신을 잘못해도 이런 모함을 받을 수 있다. 미국에 가서 조용히 공부나 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예의가 바른 김홍걸은 “아저씨, 알겠습니다. 미국으로 가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최규선을 같이 있는 자리에서 불러 “너는 정치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다. 그러니 정치하겠다는 뜻을 접고, 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라. 그리고 오늘 이후 다시는 우리 집에 찾아오지 마라”하고 내 보좌역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렇게 두 사람을 결별시킨 후 나는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나 몰래 계속 만났던 모양이고, 최규선은 각종 이권사업에 뛰어들면서 훗날 ‘최규선 게이트’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던 모양이다.
어쨌든 내가 두 사람을 결별시킨 후 김홍걸은 김은성 차장한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겁이 난 김은성 차장이 약속장소인 롯데호텔에 혼자 나오지 않고 국정원 정치과장 임모 씨와 최재승 의원을 동행해서 나타났다.
이 자리에서 김홍걸은 보고서의 근거를 대라고 따졌다고 한다. 나중에 김은성 자신이 검찰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이날 김은성은 굉장히 당황해했다고 한다. 김홍걸은 또 임동원 국정원장도 만났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들은 전전긍긍했던 모양이다. 나와 대통령의 3남이 국정원보고서는 엉터리라고 했으니 이거 큰일 났다, 앞으로 대통령이 국정원 보고를 신뢰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뭐, 그런 식의 위기의식을 가졌다는 것이다.
김은성 차장은 2000년 7월 17일 제헌절 날 오전에 서울 평창동 집으로 나를 찾아왔다. 골프모임에 가려고 안방에서 나오니 그가 소파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남의 집에 찾아오려면 사전 연락을 하고 오는 것이 예의인데, 아무런 기별도 없이 불쑥 찾아왔기에 나는 조금 불쾌한 기색으로 말했다.
“당신이 우리 집에 웬일이냐?”
“고문님께 해명할 일이 있어 왔습니다.”
김은성 차장은 다시 소파에 앉으면서 들고 온 봉투에서 무슨 자료 같은 것을 꺼내려고 했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알고 있고, 그 봉투 안에 있는 자료의 내용은 안 봐도 다 안다. 그러니 그냥 말로 하라.”
김은성 차장은 대통령의 아들과 측근들에 대해 보고하게 된 배경을 해명했다. 나는 “증거 없이 증권가에 떠도는 소문만 가지고 엉터리 내용을 보고해서 대통령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 말라”며 김은성 차장을 꾸짖은 뒤 돌려보냈다.
○TV 보도와 검찰 출두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흐른 2002년 4월 30일 오전 10시경 집에서 이훈평 의원과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하고 있는데, TV 뉴스에 내가 MCI 코리아 대표이사 진승현 씨에게 5000만 원을 받았다는 자막이 지나가는 것이었다.
“저거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진승현 씨를 만난 일도 없다. 하기는 며칠 전부터 내 비서들이 그런 정보를 어디선가 듣고 귀띔을 해주었지만 나는 도리어 쓸데없는 소리 말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날 검찰은 내게 소환통보를 했다. 검찰에 가서 보니 내가 한스종금과 리젠트종금 등 진승현 씨 계열사에 대한 금융감독원 조사를 무마시켜준다는 대가로 5000만 원을 받았고, 그 돈을 전달한 사람이 김은성 차장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진승현 씨가 내게 돈을 전달했다는 시점이 김은성 차장이 최규선-김홍걸의 문제로 평창동 집에 찾아왔었던 바로 그 2000년 7월 17일 오전이었다.
나는 기가 막혔다.
왜냐하면 나는 그날 진승현 씨의 모습을 본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김은성 차장은 그날 진승현 씨가 자기와 함께 우리 집에 들어와 소파에 10초쯤 앉아 있다가 돈이 든 쇼핑백을 놓고 나갔다고 했고, 또 다른 진술에서는 최규선 문제로 분위기가 어색했고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같아 밖에 있던 진승현 씨를 안으로 불러들이지 못했다고도 했다.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였다.
게다가 김은성 차장은 그날 내게 “최규선을 조심하십시오. 비리에 관련되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충고했는데, 자기 말로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는 바로 그 자리에서 진승현 씨에 대한 청탁을 하며 돈을 건넸다는 것이다.
나는 진승현 씨로부터 돈 받은 사실은 물론이고 진승현 씨를 만난 적도 없다며 검사의 심문을 조목조목 반박했고, “응접실에서 단 둘이 대면한 뒤 돈이 든 쇼핑백을 놓고 나왔다”는 김은성 차장의 진술도 부인했지만, 검찰은 돈을 줬다는 진승현과 김은성의 진술이 상당히 구체적인 데다가 서로 일치하고 있다며, 나를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 ‘진승현 게이트’ 보도 전날 박지원의 전화 한통 ▼ 수사 귀띔 없이 “형님 어딥니까”
권노갑 고문이 TV 아침 뉴스에서 검찰 소환 방침을 접한 2002년 4월 30일 저녁, 그의 서울 평창동 자택을 찾아온 여자 손님이 한 사람 있었다. 석 달 전 취임한 송정호 법무부 장관(현 법무법인 한중 고문변호사)의 부인이었다.
송 장관의 부인은 권 고문의 부인을 위로하면서, 청와대가 검찰 소환을 수수방관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권 고문 부인의 심정을 대변한 것이었다.
송 장관은 권 고문이 적극 추천한 인물이었다. 15대 대선 직전 DJ(김대중) 비자금 문제가 불거지고 이회창 후보의 신한국당이 연일 수사를 요구하며 YS(김영삼)를 압박할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 주재 내부회의 자리에서 가장 강하게 ‘불가(不可)’를 외친 사람이 송정호 광주고검장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수사를 시작하면 호남에서)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송 고검장은 그렇게 반대했다.
DJ는 그런 송 고검장에게 마음의 빚을 가지고 있었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권 고문이 그를 법무부 장관으로 추천한 것이다.
송 장관의 부인이 돌아간 다음, 권 고문 부부는 박지원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서운함으로 몸을 떨었다. 서운함을 넘어 배신감이 들 정도였다.
권 고문은 바로 하루 전 박 실장의 전화를 받았다. 제주도에서 골프를 치고 있었는데 박 실장은 “형님, 어디 계십니까?”라고만 물었을 뿐 검찰 소환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동교동계 안에서도 특히 권 고문과 가까웠던 김옥두 의원에게 귀띔을 해줬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지만, 김 의원은 그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박지원에 대한 권노갑의 불신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박지원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권노갑 소환 보름 전쯤 비서실장에 임명된 박 실장은 법무부로부터 검찰의 움직임을 전해 듣자마자 DJ에게 달려갔다.
박지원=“아무래도 권 고문에게 알려줘야 할 것 같습니다.”
DJ=“….”
박지원=“제가 연락해보겠습니다.”
DJ=“하지 마시오.”
비서실장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소환 당사자에게 수사기밀을 누출하는 것 자체가 검찰에 대한 외압. DJ의 ‘연락 금지’ 지시는 당연한 것이었다. 박 실장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박 실장은 괴로웠다. 동교동계의 좌장일 뿐 아니라 지금까지 모든 문제를 상의해온 ‘맏형’이 바로 권 고문인데.
박 실장은 다시 DJ에게 인간적인 배려를 호소했다. “김옥두 의원과 상의해보게.” DJ도 한 걸음 물러섰다. 즉각 김옥두 의원을 찾았다. 그런데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송정호 법무부 장관으로부터 급보가 올라왔다. 권 고문이 검찰에 출두했다는 것이었다.
그해 추석을 앞둔 어느 날. 박 실장의 부인이 평창동으로 권 고문의 부인을 찾았다. 위로 방문이었다. 하지만 권 고문 부인의 태도는 싸늘할 대로 싸늘해져 있었다. 애견만 어루만질 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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