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 사상 현직 국회의원에게 내란음모죄가 인정된 것은 처음이다. 1987년 민주화 체제 이후 첫 내란음모 유죄 판결문은 473쪽에 달했다. 재판장이 미리 준비한 판결문 요지를 읽어 내려가는 데만도 2시간이 넘게 걸렸다.
○ 제보자 진술 신빙성 인정
재판부는 내란음모 판단의 핵심인 구체적인 실행 계획, 실현 가능성, 실질적 위험성을 모두 인정했다. 재판부는 우선 내란음모의 주체로 RO를 지목하며 폭동을 일으킬 준비가 돼 있다고 봤다. 그동안 변호인 측은 RO에 대해 “국가정보원이 조작한 상상 속의 실체 없는 조직”이라고 반박했지만, 재판부는 “내란음모 사건을 처음 국정원에 제보한 이모 씨의 법정 진술에 신빙성이 있다”며 RO의 조직성을 인정했다. 이 의원에 대해선 회합 내내 명령조의 발언을 하고 ‘혁명의 수뇌부’로 호칭된 것 등을 근거로 RO의 총책으로 봤다.
국헌 문란 목적에 대해서도 “이 의원을 포함한 RO 조직원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전시를 틈타 후방교란을 통해 무력으로 대한민국을 전복할 것을 꾀했다”고 인정했다. 재판부는 이 의원이 지난해 5월 12일 회합에서 “지배세력이 60여 년간 형성해온 물적 토대를 무너뜨리기 위한 정치·군사적 준비”를 지시하고 “저놈들의 통치에 파열구를 내고 전선의 허를 타격하자”고 말한 발언 등을 그 근거로 들었다. 또 이 의원의 발언은 북한의 대남 혁명이론과 부합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한 지방의 평온을 해하기에 충분하고 폭탄 제조 및 테러 사례와 함께 정보 수집 논의까지 이뤄졌다”며 폭동의 실질적 위험성도 인정했다. 이 의원이 회합의 마무리 발언에서 “총공격의 명령이 떨어지면… 각 동지들이 자기 초소에서 무궁무진한 창조적 발상으로 한순간에”라고 말한 것에 비춰 볼 때 이 의원의 RO 내 지위, 회합의 성격, 폭동의 모의가 모두 인정된다는 것이다.
○ “김일성이 썼던 호칭 사용”
그동안 변호인 측은 검찰 측 증인의 진술과 증거에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해왔다. 특히 RO의 실체를 밝히는 데 핵심적인 증언을 했던 전 조직원 이모 씨가 국정원에서 경제적 대가를 받고 거짓 증언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씨가 10년간의 조직 활동에 회의를 느껴 스스로 제보했고, RO 조직원과의 대화를 녹음한 것도 스스로 결정한 것”이라면서 “RO 가입식 등 많은 일화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또 5월 10일 곤지암 회합에서 논란이 됐던 이 의원의 발언에 대해서도 검찰의 손을 들어줬다. 변호인 측이 “김근래 자네, 지금 오나?”라며 ‘지휘원’이라고 부르지 않았다고 강하게 부인했던 부분에 대해 검찰의 주장대로 “김근래 지휘원, 자네 지금 뭐하는 거야”로 들린다고 판단했다. 재판장은 ‘녹음파일 내용’에 대해 설명하면서 헤드폰을 이용해 여러 차례 반복해서 들었더니 확실하게 들렸다고 밝혔다.
‘지휘원’이란 표현에 대해선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과정에서 부하를 지휘원이라고 칭하는 연설이 있다는 점을 짚었다.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표현일뿐더러 이 의원의 자택에서 압수한 김일성의 저작집에서 나온 표현이라는 점이 유죄 심증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 국가보안법 위반 일부만 무죄
재판부는 ‘적기가 제창’ 등 일부 국보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만 무죄로 판단했다. 이 의원이 단순히 이를 따라 불렀을 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 또 검찰 측이 법정에서 재생하지 못한 일부 북한 영화 DVD에 대해서도 역시 무죄를 선고했다.
선고가 끝나자 이 의원은 방청객들에게 손을 흔들며 미소를 띤 채 자리를 떴다. 이 의원 측 김칠준 변호사는 선고 후 “정해진 결론에 일사불란하게 맞춰진 듯한 느낌이다. 검찰이 추측으로 기소한 것이 오늘은 추정으로 재판이 내려졌다”며 재판부를 비난했다. 변호인 측이 즉각 항소 의사를 밝혔고, 검찰도 항소할 가능성이 높아 양측의 공방은 2라운드로 접어들 것으로 보인다. 항소심은 서울고등법원에서 진행되며, 그동안 수원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이 의원은 서울구치소로 이송될 것으로 전망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