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황제 조훈현 국수(61)의 집은 서울 종로구 평창동이다. 바로 북한산자락 발치에 자리 잡은 2층 양옥집. 그는 곧잘 동네 뒷동산이나 마찬가지인 형제봉에 오른다. 멀리서 보면 두 개의 봉우리가 나란히 머리를 맞대고 있다. 큰 형제봉(463m)과 작은 형제봉(461m)이 다정하게 이야기라도 나누는 듯 살갑다.
형제봉은 보현봉(700m)과 능선으로 이어진다. 보현봉은 삐죽이 고개를 내밀어 서울 장안을 들여다보는 형상. 형제봉 앞쪽은 북악산하늘길이 잔등을 따라 구불구불 빗장처럼 가로지르고, 그 아래가 바로 청와대와 사대문 안이다. 저 멀리 남산과 관악산이 머리를 주억거리며 병풍처럼 서 있다.
“봄엔 꽃동산이다. 우리 집에서 2∼3시간 산보코스로 딱 좋다. 형제봉에서 대성문을 지나 북한산성을 반쯤 돌 때도 있고, 보현봉 언저리를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산에선 같은 코스를 타지 않는다. 왔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는 일은 없다. 산꾼 선배들한테서 그렇게 배웠다. 30대엔 설악산도 즐겨 찾았다. 험하다는 공룡능선도 큰 문제없이 탔다. ‘설악산 반달곰’으로 불렸던 권금성산장(2009년 철거)의 털보 유창서 씨(1937∼)가 생각난다. 언젠가 그분이 송이버섯을 넣어 끓여준 라면 맛은 정말 최고였다. 설악산에서 내려올 때마다 동해안에 가서 회 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지리산은 노고단산장의 함태식 선생(1928∼2013)이 대단했다. 그분도 털보였는데 ‘지리산호랑이’로 유명했다. 누가 고성방가라도 하면 날벼락이 떨어졌다. 내가 담배를 많이 피운다고 ‘금연’이란 팻말 앞에서 사진을 찍게 하기도 했다. ㅎㅎㅎ”
요즘 조 국수는 한가하다. 옛날엔 하루걸러 피 말리는 대국을 치렀지만, 최근엔 한 달에 한 번이나 될까. 세월엔 장사가 없다. 40대 중후반부터 영 ‘입력’이 안 된다. 그러니 묘수, 신수(新手)가 나올 리가 없다. 하루 서너 갑씩 줄기차게 뿜어댔던 담배는 마흔셋에(1996년) 딱 끊어버렸다. 술이야 밀밭에만 가도 해롱거리는 체질. 주위에서 ‘남자가 그깟 한잔도 못 마시느냐’며 약을 올리는 바람에 ‘에라, 모르겠다’하고 받아먹었다가 3번이나 장렬하게(?) 쓰러졌다. 그때 비로소 ‘지구가 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누구나 인정하는 바둑천재. 한마디로 그의 바둑 발자취는 휘황찬란하다. 세계최강 바둑한국을 쏘아 올렸던 것도 1989년(제1회 잉창치배 우승) 그였고, 승승장구 ‘최강 한국바둑’을 앞장서 이끌었던 것도 그였다. 특히 잉창치배 우승은 월드컵축구 제패만큼이나 엄청난 쾌거였다. 세 번에 걸친 국내 전(全) 타이틀석권(1980, 1982, 1983), 국수전 10년 연속 우승(1985), 패왕전 16회 연속우승(1978∼93), 세계최초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1994)…. 그런데 왜 요즘 한국은 중국에 자꾸만 밀릴까.
“바둑은 일단 천재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 그 천재가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재목이 보이지 않는다. 이세돌은 천재가 아니라 독특한 기풍을 가진 ‘천재형’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형 우칭위안(吳淸源·1914∼)은 천재이면서도 엄청난 노력가였다. 어린시절 얼마나 바둑책을 한손에 들고 많이 보았으면, 왼손 손가락이 기형으로 굽었겠는가. 한번은 세고에 선생님이 우칭위안을 머리 좀 식히라며 야구장에 보냈다고 한다. 그런데 우칭위안은 야구장에서 야구는 보지 않고, 고개를 젖혀 하늘만 보더라고 했다. 하늘을 바둑판 삼아 바둑공부를 했던 것이다. 그분은 올해 우리 나이로 백한 살이지만, 지금도 검토실에서 ‘이렇게 둬야지’하며 자신의 의견을 밝힌다고 한다. 바둑은 천재가 아니면 아무리 키워봤자 소용없다. 죽어라 공부해도 안되는 게 바둑이다.”
조 국수는 나이 서른하나(1984년)에 이창호(당시 9세, 현재 39세)를 내제자로 받아들였다. 인연이랄까 숙명이랄까. 이창호는 2년 만에 입단대회를 통과했고, 1990년 최고위전에서 스승을 꺾었다. 그리고 그 이후엔 파죽지세로 스승이 갖고 있던 타이틀을 하나둘씩 가져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침 한 식탁에서 밥을 먹고, 조 국수 부인이 운전하는 한 승용차를 타고 나와, 서로 마주앉아 피 터지는 대국을 했다. 그리고 한사람은 승자, 또 한사람은 패자가 되어, 역시 한 승용차를 타고, 같은 집으로 돌아갔다. 결국 1991년 이창호는 스승의 품을 떠나 하산했다.
“푸하하, 맞아서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도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빨리 온 것뿐이다. 아내가 가운데서 가장 힘들었을 것이다. 창호는 원래 말이 없는데다가, 그런 날은 고개까지 푹 숙이고 있으니…. 보통 천재는 반짝반짝 금방 눈에 띈다. 그런데 창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재’다. 창호는 자기 바둑수순도 잊어 먹는다. 세상에 그런 천재가 어디 있나. 게다가 창호는 당연히 치고나가야 하는 수순인데 갑자기 하수처럼 물러난다. 난 어이가 없어 야단을 친다. 그러면 떠듬떠듬 말한다. ‘그렇게 하면 싸움이 붙고, 그러다가 아차하면 역전 당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물러서면 2, 3집밖에 못 이기겠지만, 결코 지는 일은 없다’고. 맞다. 끝내기는 정상급기사라면 누구나 잘한다. 하지만 창호는 반집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보이지 않는 0.7집을 알고 그 수순을 밟아간다. 그래서 결국 한집을 만들어낸다. 평범한 바둑 같은데 볼 건 다 본다.”
조 국수는 예민하지만 쿨하고 단순하다. 휴대전화기나 운전면허증도 없다. 카드도 몇 년 전에야 만들었다. 무슨 징크스 같은 것도 굳이 만들지 않는다. ‘제비’, ‘전신(戰神)’, ‘화염방사기’… 등 그의 별명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건 팬들 마음이라며 웃는다. 큰 대국을 앞두고도 미리 상대의 기보를 연구하지 않는다. 상대가 엉뚱한 포석이라도 들고 나오면 되레 혼란스럽다. 그저 ‘무심(無心)’이 최고다. 잠이 안 오면 무협지나 보며 시간을 때운다. 한동안 진도개, 아프간하운드, 삽살개 등을 키웠지만, 이젠 그것도 그만뒀다. 그놈들이 수명을 다할 때마다 헤어져야 하는 게 너무 가슴 아파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무관이 되니 좋은 것도 있다. 골프(90타 수준) 배울 시간이 난다. 3월엔 여태 한번도 밟아보지 못한 한라산에도 오를 참이다. 제주엔 자주 갔지만 바둑 일정 때문에 한라산은 늘 멀리서 지켜봐야만 했다.
“내 바둑인생 8할은 ‘엄청난 스승들’ 덕분이다. 세고에 스승이야 말할 것 없고, 무협지의 취권 도사 같은 후지사와 선생님도 아낌없이 사랑을 주셨다. 1985년 그분 환갑연 때 가보니 좌우에 부인이 두 분이나 있었다. 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거의 날마다 경마, 경륜, 마작에 빠졌었는데, 알고 보니 여인도 많았다. 불가사의하다. 다른 사람의 2, 3배의 인생을 살았던 분 같다. 제자 창호는 인간적으로 욕은 안 먹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되는 거다. 바둑보다 인간이 먼저다. 스승으로서 다행스럽다. 바둑이 하루빨리 전국체전 정식종목이 돼야 할 텐데 걱정이다. 정부가 체계적으로 지원 육성해야 한다. 이대로 가다간 일본 바둑 꼴 난다.”
조훈현의 정식 스승은 일본의 세고에 겐사쿠(1889∼1972). 그는 나이 일흔넷(1963년)에 조훈현을 제자로 받아들였다. 그는 평생 3명의 제자만을 두었다. 일본의 하시모토 우타로(1907∼1994), 중국의 우칭위안, 한국의 조훈현이다.
하시모토는 일본 관서기원의 창시자, 우칭위안은 ‘살아있는 기성(棋聖·Go Master)’, 조훈현은 바둑황제. 세고에는 한중일의 바둑천재 딱 한 명씩만 데려다 키웠다. 파천황(破天荒).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획을 그을 재목이 되지 않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바둑기술보다는 ‘사람 됨됨이와 그릇’을 중시했다.
조훈현은 세고에 도장에서 9년 동안 수련했다. 하지만 스승 세고에로부터 지도받은 대국은 실제 10판이 채 넘지 않았다. 스승은 원래 1년에 지도국 한 판만 두는 스타일. 조훈현의 실전 스승은 ‘괴물 슈코’로 유명한 후지사와 슈코(1925∼2009)였다. 그는 ‘오는 사람 누구나 받아준다’며 후지사와연구회를 열고 있었다. 그곳에는 오다케, 린하이펑(林海峰), 고토 노리오 등 강호 고수들이 즐비했다. 조훈현은 그곳에서 후지사와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후지사와는 조훈현보다 스물여덟이나 위. 하지만 후지사와는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자유분방하고 시원시원했다.
후지사와는 어린 조훈현만 보면 “덤벼라, 쿤켄(훈현)!”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본 제일의 속기파이자 싸움바둑. 조훈현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순식간에 뚝딱뚝딱 한판씩을 해치웠다.
“사실 세고에 선생님으로부터는 바둑을 별로 배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바둑의 도(道)’랄까, ‘사람의 도리’랄까, 그런 정신적인 것을 배웠지. 바둑은 후지사와 선생님에게 배웠다. 1977년쯤인가. 그분이 나를 보고 싶다고 한국에 오셨는데, 뒷주머니에 달랑 마시다 남은 위스키 한 병만 넣어 오셨다. 그래도 명색이 외국 나들인데 하다못해 가방은커녕 치약, 칫솔도 없었다. 세관원들이 어이없어 했다는 말을 들었다. 그분은 그렇게 술을 좋아했다. 아니 알코올중독자였다. 한국에 계시는 3박 4일 동안에도 호텔 밖으로는 한번도 나가지 않았다. 나하고 얘기하고 바둑을 두거나, 찾아온 한국 바둑인들과 술만 마셔댔다. 일본에서 나하고 바둑 둘 때도 아침부터 술이 얼큰했다. 그 와중에 수읽기를 어떻게 하는지 신기했다. 위스키를 박스째 사다놓고 마셨다. 정량은 하루 1∼2병. 그분은 늘 ‘난 1년에 딱 4판만 이긴다’고 말했다. 그것은 최다상금인 기성전 타이틀전(7전4승제) 등에서 이기면 된다는 뜻이다. 그분이 유독 ‘1기전의 사나이’라 불리며 처음 시작하는 기전에서 강한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런 첫 기전은 상금이 많기 때문이다. 신통한 것은 큰 타이틀전을 앞두고는 두 달 전부터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다. 문제는 대국 당일 손이 떨려서 바둑돌을 제대로 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녹차에 위스키를 타서 마시면서 바둑을 두었다. 대국 중 음주는 금지였기 때문에 편법을 쓴 것이다. 하여튼 그분은 상금을 타면 그 즉시 다시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1972년 3월 조훈현은 병역문제로 귀국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 8월 공군에 입대했다. 스승 세고에는 하늘이 무너진 듯 낙심천만했다. 한국 병무청에 직접 병역연기 탄원서를 내는 등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게다가 제자가 떠난 한 달 뒤(4월) 그의 오랜 벗 노벨문학상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1899∼1972)가 가스를 마시고 자살했다. 세고에 나이 여든셋. 그는 집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7월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두 통의 유서를 남겼다. 한 통은 가족에게 ‘노구로 더이상 신세지기 싫어 먼저 떠나고자한다’는 내용. 또 한 통은 친구, 후배들에게 ‘조훈현을 꼭 다시 데려와 대성시켜 주기 바란다’는 간절한 부탁.
“스승의 죽음을 듣고 한동안 머릿속이 하얗고 멍했다. 그분은 대들보에 목을 매단 게 아니라 앉아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졸라 돌아가셨다고 했다. 역사상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사람이라면 ‘열이면 열 스스로 손을 놓아버린다’는 것이다. 그만큼 스승은 대꼬챙이 같은 분이셨다. 친구 가와바타의 자살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아마도 나의 귀국이 90%쯤 원인제공을 하지 않았을까 느낀다.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더구나 그 몇 달 뒤에 내가 강아지 때부터 키웠던 아키다견 벵케이가 밥을 안 먹고 비실거리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 이야길 듣고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스승의 죽음에도 나오지 않았던 눈물이 나왔다. 내가 떠나는 날 낮게 낑낑대며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조훈현 약력
▽1953년 전남 목포 출생 ▽서울이주 본격 바둑수업(1958) ▽사상 최연소 프로입단(9세·1962) ▽일본 세고에 겐사쿠 9단 문하입문(1963) ▽일본기원 입단시험 통과(초단·1966) ▽일본 기도상 신인상수상(33승 5패 1빅·1970) ▽병역문제로 귀국(1972) ▽공군입대(1973)
우승 경력=▽최고위우승(1974) ▽국내 전(全) 타이틀석권(1980) ▽한국 최초 9단 승단, 제2차 국내 전 타이틀석권(1982) ▽제3차 국내 전 타이틀석권(1983) ▽국수전 10년 연속 우승(1985) ▽잉창치배 우승(1989) ▽타이틀획득 세계최고기록(124회·1992) ▽패왕전 16회 연속우승(1978∼93) ▽세계최초 세계대회 사이클링 히트(1994) ▽공식대국 1000승(1995) ▽삼성화재배 우승(2002·49세로 최고령타이틀 획득) ▽대주배 우승(2013·통산 159회 우승, 2위 이창호 140회, 3위 이세돌 42회) ▽타이틀전 최다출전(234회) ▽통산 최다승(1910승, 승률 70%, 2위 이창호 1655승, 승률 74%) ▽통산 최다 대국수(2734대국) *이상 2014. 2.17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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