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봄날 오후였다. 점심을 먹고 돌아온 그는 평소처럼 신문들을 뒤적였다. 스포츠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뇌성마비 장애인으로 구성된 곰두리축구단이 한국 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하는데 연습할 곳이 없어 전국을 떠돌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명색이 대표팀인데 이래서야 되나.’ 그는 바로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했다. 잠시 뒤 공군사관학교와 연결이 됐다.
“나 총장인데, 수업과 작전에 지장이 없는 범위 안에서 축구단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해 보세요.”
충북 청원군 공군사관학교에는 천연잔디구장이 여러 개 있다. 좋은 시설의 기숙사와 식당도 갖췄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숟가락 하나만 얹으면’ 되는 일이었다. 참모총장의 지시(?)를 누가 거부하랴. 곰두리축구단은 공사에서 합숙훈련을 시작했다. 공군본부 장성들과 친선경기도 했다. 그해 연말 그는 정책회의를 통해 공사의 장애인체육 지원을 명문화했다. 그래도 그때는 몰랐다, 신문 기사 하나가 자신의 인생을 바꿀 줄은. 우연히 들어선 길… 장애인 체육
“주위에 장애인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관심도 없었죠. 공군에 있으면서 대민봉사 활동으로 양로원과 보육원은 많이 갔지만 장애인시설을 찾은 기억은 없어요. 그런 내가 이 자리에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김성일 대한장애인체육회 회장 겸 2014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66). 그는 ‘빨간 마후라’를 두르고 전투기를 몰았던 파일럿(공사 20기) 출신이다. 2005년 10월 제29대 공군 참모총장에 취임하며 공군으로서 가장 높은 곳에 올랐다. 우연히 접한 신문 기사가 군인을 장애인체육인의 길로 이끌었듯 그가 공군의 길을 걷게 된 것도 우연한 만남 덕분이었다.
“학생 맞지? 어디까지 가니?”
사복을 입고 잔뜩 멋을 부렸지만 까까머리인 그에게 옆자리 여자가 말을 건넸다.
1967년 6월 7일 오후 경북고 3학년 김성일은 열차에 있었다. 휴일인 현충일에 서울로 왔다가 다음 날 집에 가는 길이었다.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공부를 잘했던 그는 고교 2학년 말부터 교과서를 팽개쳤다. 수업은 뒷전인 채 음악 감상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왠지 멋있게 보여서’ 그랬다. 서울에 간 것도 당시 잘나간다는 ‘명동 쎄시봉’에 가보고 싶어서였다.
“대구 갑니다. (내심 우쭐해하며) 경고(경북고)에 다니고요.”
“나랑 같은데 가네. 좋은 학교 다니는구나. 이름이 뭐니?”
예쁜 여자와 대화를 하는 게 싫지 않았다. 여자는 대구 한 여학교의 체육교사라고 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며칠 뒤 담임선생님이 불렀다. 그 여선생님이 “느낌이 이상하다”며 전화를 했다는 것. “괜찮은 학생이었는데 요즘 문제가 많다”는 담임의 설명에 여선생님은 학생을 직접 만나 상담을 하고 싶다고 했다. 김 군은 며칠 뒤 여선생님을 다시 만났다. “공부를 하면서 음악도 즐기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얘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이상하게’ 그 여선생님의 말은 듣고 싶었다.
덮었던 교과서를 다시 폈지만 앞이 캄캄했다. 그래도 선생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그해 9월 말 일반대학 입시에 앞서 공사생도 모집공고가 게시판에 붙었다. 한 번도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안 했지만 원서를 냈다. ‘내 실력이 어느 정도 될까’ 테스트나 해볼 요량이었다. 10월에 시험을 봤고 얼마 후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생각도 안 했던 길… 공군 파일럿
“의논도 않고 사관학교 시험은 왜 본 거냐. 못 간다.”
아버지는 아들의 결정을 반대했다. 재수를 하면 어릴 때부터 목표로 했던 의대에 진학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저도 갈 생각 없어요. 다만 신체검사를 꼼꼼히 한다는데 받아보고 싶습니다.”
신체검사라는 말에 아버지는 움찔했다. 그게 아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진해중 3학년 때 큰 병을 앓았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목도 돌릴 수 없고 몸도 움직일 수 없었다. 동네 병원에서 포기해 진해 해군병원으로 옮겼다. ‘결핵성 뇌막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죽거나 장애인이 된다”고 했다. 입원한 지 13일째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의사는 “오늘 밤을 못 넘길 것”이라고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불 속에서 목사님의 임종예배를 들었다. 하지만 다음 날, 눈을 떴다. 죽지 않았다.
투병을 시작했다. 매일 오전 10시 5분 전 간호사가 사지를 밧줄로 묶었다. 잠시 뒤 의사가 들어와 척추 사이에 골수주사를 놨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매일 아침 엄습하는 공포감에 펑펑 울었다. ‘톱으로 다리를 자르는 게 낫다’고까지 생각했다. 곁을 지키고 있는 어머니에게 “차라리 죽게 해 달라”는 말도 여러 번 했다.
6개월이 지나 퇴원했다. 병원에서는 기적이라고 하면서도 후유증을 걱정했다. 당시만 해도 그 병을 앓은 뒤 건강하게 산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중학교 3학년 과정을 다시 다니면서도, 고등학생이 돼서도 그는 별다른 이상을 느끼지 못했다.
“결국 12월에 신체검사를 받았어요. ‘아주 건강하다’는 결과가 나왔죠. 같은 날 체력검사도 치렀는데 100m와 2000m 달리기에서 제일 빨랐어요. 우리 영감님(아버지)한테 얘기했더니 잘됐다, 하시면서도 공사는 가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도 이미 합격한 곳이 있는데 또 힘들게 공부하고 싶겠어요? 머리를 굴렸죠. ‘아직은 장담할 수 없다. 힘든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내 몸을 제대로 테스트하고 싶다’고 우겼더니 그제야 허락을 해 주시더군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훗날 그러셨죠. 그때 공사에 가기를 참 잘했다고.” 공군 수장에서 장애인체육 수장으로
참모총장 시절의 인연 덕에 김 회장은 2007년 전역 후 대한장애인축구협회 회장에 추대됐다.
“부탁을 하기에 얼떨결에 맡았죠. 하지만 막상 일을 하다 보니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거예요. 사무실을 얻는 것부터 그랬죠. 보증금과 월세까지 다 합의해 놨는데 장애인단체라는 것을 알더니 못 빌려주겠다는 겁니다. 빌딩 여기저기에 텅 빈 사무실이 많은데도 ‘이미지가 나빠진다’ ‘기존 입주자가 싫어한다’는 이유를 대더군요. 돈을 깎아 달라는 것도 아닌데…. 결국 간판을 달지 않는 조건으로 입주를 했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느꼈죠. 장애인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이 정도구나. 화가 났습니다. 싸움도 많이 했고요.”
장애인들과 함께하며 그는 자연스럽게 ‘장애인체육인’이 됐다. 2008년 베이징 장애인올림픽(패럴림픽) 단장을 지냈고 지난해 2월에는 2014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 조직위원장이 됐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치열한 선거전 끝에 장애인체육회 3대 회장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 회장은 최근 2017년 11월 말까지인 자신의 임기를 그해 2월 초로 10개월가량 줄이자고 제안했다. 2018년 3월에 열리게 될 평창 패럴림픽 준비를 위해 후임 회장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자는 의도였다. 각종 체육단체 수장을 맡아 자리 보전하기에 급급한 사람이 많은 현실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김 회장은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이룰 때가 많다. 특히 개막이 8개월도 남지 않은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대회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온다.
“4년 전 급하게 책정된 예산이 현실과 안 맞아요. 아무리 아껴도 최소 1000억 원은 있어야 되는데 확보된 예산은 800억 원이 안 돼요. 비장애인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예산은 1000억 원이 넘는 기업 후원금을 포함해 5000억 원가량 됩니다. 반면 우리 대회 후원금은 아직 20억 원도 안 됩니다. 그나마 대한항공이 15억 원을 내놓은 덕분이죠. 매일 기업들을 찾아다니며 ‘홍보 효과는 덜 하겠지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생각해 달라’고 호소하고 읍소해 봐도 결과가 신통치 않네요. 제 능력이 부족한 탓이겠죠.”
인터뷰를 하는 내내 ‘노블레스 오블리주(사회 지도층 인사의 도덕적 책무)’라는 말이 떠올랐다. 편히 살 수 있는 길을 뒤로한 채 괜한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아니냐고 물었다.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를 포함해 외국의 장애인체육 관계자들을 만날 때 ‘전직 공군 참모총장이다’라고 하면 다들 깜짝 놀라요. ‘공군총장 출신이 장애인체육을 위해 일하는 건 처음 봤다’며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많았지요.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지는 몰라도 그런 말을 들으면 가슴이 뿌듯해요. 그동안 받아온 것을 국가와 사회에 돌려주는 느낌이랄까요.” 에필로그
공군 대령 진급을 앞둔 어느 날. 함께 교회에 다녀오던 길에 김 회장은 1972년 소위 시절 결혼한 동갑내기 아내 이선숙 씨에게 물었다.
“여보, 요즘 기도 제목이 뭐요?”
당연한 대답을 기대했지만 결과는 의외였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알겠는데 나는 당신이 생각한 기도를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당신, 그러고도 내 아내 맞소? 군인에게 대령 진급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예상치 못한 답변. 남편은 당황했지만 아내는 침착했다.
“대신 늘 이런 기도를 해요. 진급에서 떨어지더라도 용기를 잃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김 회장은 그때 일을 떠올리며 “나는 현실에 안주하려 하는데 아내는 달랐다.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며 웃었다. 그는 군 생활을 하며 한 번도 진급에서 누락되지 않았다. 대한장애인체육회장 출마를 앞두고도 김 회장은 아내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내는 이번에도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얘기를 꺼냈다.
“당신의 자세와 눈높이를 휠체어 탄 사람보다 낮출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 보세요.”
김 회장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다짐을 선뜻 내놓지 못했다. 아내의 말을 생각하며 며칠 동안 고민한 뒤 출마를 결심했다. 요즘도 힘들 때면 그 말을 되새긴다고 했다.
장애인체육의 조종간을 잡은 김 회장은 5일 러시아로 떠난다. 7일(현지 시간) 개막하는 2014 소치 겨울패럴림픽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얘기를 꼭 써달라고 부탁했다.
“언론에서 올해 스포츠 3대 이벤트로 소치 겨울올림픽, 브라질 월드컵축구, 인천 아시아경기를 꼽는데 소치 패럴림픽과 인천 장애인아시아경기 2개를 더해 ‘5대 이벤트’로 써주세요. 대한민국의 장애인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 땀을 흘리며 기다려온 대회인데요. 그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꼭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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