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악성민원 적극 대응하자… 中企상대 환불요구-협박 급증
입소문-SNS여론 취약한 中企들… “후환 두려워 부당요구 수용” 84%
상습민원인 공동대응 시스템 시급
“칼만 안 들었지 강도나 다름없습니다. 막무가내로 소리 지르고 온갖 협박을 하는데 누가 당하겠습니까.”
지난달 한 중소 의류업체 매장을 찾은 50대 여성 A 씨는 첫마디부터 목소리를 높였다. “이따위 옷을 파니까 중소기업이지”라며 쇼핑백을 던지듯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쇼핑백에는 군데군데 보푸라기가 인 겨울 외투가 담겨 있었다. 지금은 매장에 진열도 안 된 3년 전 상품이었다. 교환이나 환불은 구매 후 10일 이내에 가능하다는 규정을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는 “중소기업이라 고객 서비스가 엉망이다. 환불해주지 않으면 인터넷에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업체는 결국 환불해줄 수밖에 없었다.
기업으로부터 금전적 이익 등을 얻기 위해 악성 민원을 일삼는 ‘블랙 컨슈머’가 중소기업으로 몰리고 있다. 블랙 컨슈머가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면서 대기업들이 악성 민원 방식을 분석해 직원들을 교육하고 블랙 컨슈머 전담 인력을 배치하는 등 반격에 나서자 상대적으로 대응 방안이 마땅찮은 중소기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중소기업제품 전용판매장인 서울 양천구 목동 행복한백화점 민원상담실은 최근 일주일에 두세 건씩 들어오는 악성 민원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만 해도 한 달 평균 한두 건이던 것이 최근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 이 백화점 관계자는 “품질보증기간이 지났거나 사용 흔적이 확연한 제품을 환불해 달라거나 외부 소비자단체에서 문제가 없다고 결론 내린 상품에 대해서도 막무가내로 항의하는 악성 민원이 늘고 있다”며 “중소기업들은 ‘친절한 응대’ 외에 대응 매뉴얼이 없어 더 독하게 구는 것 같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브랜드 인지도가 낮아 부정적인 인터넷 게시물이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글 하나에도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또 기업 규모가 작아 블랙 컨슈머 전담인력을 두기도 어렵고 대부분 입소문 마케팅에 의존하다 보니 블랙 컨슈머의 협박에 더 취약하다.
녹색소비자연대 이주훈 국장은 “한두 건의 악성민원 문제를 해결하려고 수개월을 소요해 법적으로 결백함을 밝혀도 그 사이 중소기업 이미지는 훼손된다”며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대응 능력이 떨어지고 악의적 민원에 적극 대처하기보다 상대적으로 조용히 처리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블랙 컨슈머들이 악용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내 중소기업 대다수는 블랙 컨슈머의 악성 민원에 이렇다 할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블랙 컨슈머의 부당한 요구를 경험한 중소기업 203개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83.7%가 ‘악성 민원을 그대로 수용한다’고 답했다. ‘법적 대응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처한다’(14.3%)에 비해 5배 이상으로 높은 수치다. 피해가 늘어도 악성 민원을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업 이미지 훼손’(90%) 때문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전문가들은 중소기업들이 공동으로 상습적 블랙 컨슈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DB)를 마련하고 공동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지적한다. 이승신 건국대 소비자정보학과 교수는 “최근 블랙 컨슈머들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만나 조직적으로 활동하거나 수법을 공유하는 등 치밀해지고 있다”며 “중소기업들이 상습적인 블랙 컨슈머의 정보와 행동 유형에 따른 대응방안을 마련해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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