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구청장의 출판기념회에 얼굴을 내밀고, 출마 예상자의 출판기념회에는 가족이나 지인을 대신 보내는 양다리를 걸치는 직원이 꽤 있다. 한번 찍히면 심한 경우 단체장이 3연임을 하는 12년 동안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지방 공무원들이 짜낸 고육지책이다.”
서울의 한 구청 공무원이 털어놓은 얘기다. 지방자치단체장 당선이 유력한 사람에게 ‘눈도장’을 찍고 ‘줄서기’를 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선거가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요즘 지자체 공무원들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다.
다른 선거 출마를 위해 단체장이 사퇴한 지자체는 장(長)이 공석이니 업무를 ‘대충대충’ 하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고, 현직이 연임 도전에 나선 경우는 ‘공무원 줄 세우기’나 ‘행사 동원’이 비일비재하다.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지방 행정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다. 현안들이 선거 이후로 미뤄지면서 정책은 표류하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
○ “누가 책임지나” 사업 추진 혼선 우려
6·4지방선거를 앞두고 ‘급’을 올려 선거에 출마하려는 자치단체장 및 부단체장 26명(기초 22명, 광역 4명)이 사퇴 또는 사퇴의사를 밝히고, 재선에 도전하는 현직 단체장들이 선거에 ‘올인’하면서 지방 행정의 공백이 우려되고 있다.
단체장의 사퇴로 일부 지역은 현안 사업이 갈피를 잃고 있다. 강원 춘천시는 이광준 시장과 전주수 부시장이 각각 강원도지사, 춘천시장 출마를 위해 지난해 12월 잇따라 사퇴한 뒤 ‘월드라이트파크’ 조성사업 추진 문제를 놓고 오락가락 행보를 보였다. 월드라이트파크는 옛 미군기지인 캠프 페이지 터에 빛 테마파크를 조성하는 민자사업이다. 민자 사업자의 자금난으로 진척이 없자 춘천시는 1월 28일 “사업을 중단한다”고 발표했다가 다음 날 “사업비 중 50억 원을 제시하면 재개를 검토하겠다”고 방침을 바꿨다. 한 춘천시 공무원은 “깐깐하고 원칙적인 이광준 시장 체제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이라고 말했다.
춘천시는 또 매년 상반기에 하던 추경예산안 편성을 올해는 하반기로 미뤘다. 춘천시는 추경을 할 만한 특별한 사유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지역사회에서는 “시장 공석 상황에서 결정하기 힘든 일부 사업의 추진 여부 결정을 신임 시장 취임 이후로 미루는 것 아니냐”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전북 전주시도 송하진 시장이 지난해 일찌감치 전북도지사 출마를 선언한 데다 장상진 부시장마저 지난달 27일 사표를 내자 시정이 삐걱대고 있다. 시청 공무원들은 “부시장이 최소한 1월 정기인사 이전에 사표를 제출했어야 후속 인사 등 시정에 차질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행사장 다니며 ‘사실상 사전운동’… 업무는 뒷전
현직에서 재선이나 3연임에 도전하는 단체장들은 업무를 뒤로한 채 각종 행사 참석에 정신이 없다. 단체장은 ‘현장 행정’으로 포장하지만 사실상 사전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환용 대전 서구청장은 최근 아파트 동대표 회의까지 참석하는 등 주민 만나기에 열중하고 있다. 박병석 국회부의장(대전 서갑)이 염홍철 대전시장에게 “구청장이 현장만 돌아다니면 구정은 언제 챙기겠느냐”고 꼬집는 일도 벌어졌다.
오규석 부산 기장군수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2건 이상의 현장 점검과 4∼8건의 외부 행사 참석으로 보내고 있다. 간부나 직원들은 퇴근 직전인 오후 5시 넘어 결재를 몰아서 받고 있다. 한 지자체 공무원은 “직원이 결재 서류를 들고 단체장이 참석한 행사 현장이나 사택까지 쫓아가는 경우가 꽤 있다”며 “결재를 못 받아 사업 추진이 지연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단체장이 업무 시간에 열리는 민간단체 주최 행사에 국·실장급 공무원을 참석시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단체장이 선거를 의식해 행사를 미리 개최하거나 예산을 앞당겨 집행하기도 한다. 지방 관가 사정에 정통한 한 국회의원 보좌관은 “단체장들이 6월 선거 이전에 집행 가능한 예산을 최대한 써버려 새로 당선된 사람이 첫해 하반기에 새로 사업을 추진할 예산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단체장이 지역 행정에 열중해야 할 공무원을 선거운동에 활용한다는 지적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광주에서는 시 공무원이 강운태 시장에게 우호적인 자료를 인터넷 언론사에 제공했다는 의혹과 관련해 시 선거관리위원회가 시 공무원을 검찰에 고발하는 일도 벌어졌다.
○ 민생 직결되는 단속 행정 느슨해져
일부 자치단체는 선거를 앞두고 최근 각종 단속 행정이 느슨해진 것으로 분석된다. 재선에 도전하는 단체장이 유권자의 눈치를 보느라 단속에 손을 놓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광주시는 시·구청장의 임기 3년 차인 2012년에 비해 4년 차인 지난해 행정 단속 실적이 대체로 감소했다. 광주지역에서 식품 원산지 표시 위반 행위는 2012년 696건 적발됐지만 지난해에는 452건으로 줄었다. 식품 위생단속 건수는 2012년 496건에서 지난해 393건으로 줄었다. 지난해에는 불법 주정차 단속 민원이 잇따르자 지자체가 아닌 경찰이 1만여 건을 적발해 5개 자치구에 통보했다. 경찰 관계자는 “단체장들이 득표를 의식해 강력한 단속을 지시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도 지난해 3월 명동의 노점상 270여 곳을 대상으로 이틀에 한 번만 영업을 허용하는 ‘2부제’를 실시했으나 선거가 가까워오면서 이 제도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명동에서는 2부제 시행 직후 노점상이 하루 130여 곳만 문을 열었지만 근래에는 매일 200여 곳이 성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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