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포털사이트 ‘다음’의 토론장 ‘아고라’에는 ‘방통위의 편파 징계, 언론자유 위협하는 정치적 심의’라는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부정선거 규탄 시국미사에 참여한 박창신 천주교 전주교구 원로신부를 인터뷰했다는 이유로 한 라디오 프로그램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주의 처분을 받은 것은 부당하다는 주장이 조목조목 담겼다.
차분한 글이었지만 이에 대한 댓글 대부분은 토론이라고 하기 힘든 욕설과 막말로 채워졌다. ‘공정보도하면 중징계당하는 개한민국’, ‘친노와 종북들은 자기네 생각이 정의인 줄 아나봐’, ‘닭그네가 미쳐 날뛰는구나’, ‘별 위원회가 개××을 떨고 있네’ 등 근거도, 논리도 없이 다짜고짜 비난을 퍼붓는 ‘악플’들이었다.
아고라의 운영 취지는 자유로운 토론을 위한 소통의 장이다. 하지만 현실은 운영자가 “다수의 이용자를 언짢게 만드는 일을 삼가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는 공간이 돼버렸다.
인터넷 도입 초기에는 사이버 공간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다. 공간과 시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다수가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장점 때문이다. 이런 핑크빛 전망과 달리 현재 인터넷 사용자가 많이 몰리는 온라인 커뮤니티들은 건전한 토론보다는 비방과 욕설, 악플이 넘쳐나고 있다.
○ 욕설의 배설공간
보수 우파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 저장소(일베)’와 ‘디시인사이드(디시)’는 사이트 내에서 반말을 사용하도록 한다. 반말을 쓰는 게 일종의 ‘법칙’인 셈이다. 반말을 사용하면 막말을 하기 쉬워지기 때문에 이용자끼리 친목을 다지는 것을 막는다. 일베를 3년간 이용한 한 회원은 이 문화에 대해 “친한 사람끼리 게시물을 추천하거나, 편들어주면서 새로운 이용자 유입을 막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암묵적 합의”라고 설명했다.
구교태 계명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무례한 언어를 사용하는 게 일상적 규범으로 받아들여지는 사이트일수록 사이버 언어폭력이 더 많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반말이 욕설, 막말의 욕구를 더 증폭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실제 일베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회원들을 향해 ‘게이’ ‘병신’이라는 호칭을 쓰며 반말을 한다. 자녀를 출산했다는 글을 올리면 “따끈해서 맛있겠다” “머리털 뜯어서 친자 확인부터 하라”는 막말을 쏟아낸다. 여자친구에 대한 하소연이 올라오면 ‘호구’ 등의 호칭으로 부르며 “김치년(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말)은 무조건 삼일한(3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이라는 댓글을 남긴다. “네 어미 창녀” 등 패륜적 댓글을 다는 사람이 있어도 원문 게시자는 그들을 고소하지 않는다. 반말, 막말이 이곳에서 통용되는 어투이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사회 현안에 대한 생산적 토론은 사라지고 막말만 남게 됐다.
커뮤니티 운영자도 ‘반말의 위험성’을 인정한다. 닉네임 ‘새부’로 알려진 일베 운영자는 사이트에 ‘반말 문화는 존댓말과는 다르게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는 말을 쉽게 내뱉도록 한다. 글 작성 전에 자신의 말이 모욕감을 주지 않을지 생각해 달라’는 당부의 글을 남기기도 했다. ○ ‘다르다’는 이유로 비방만 남아
자신과 다른 생각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제 말만 하는 배타적인 태도도 온라인 막말에 불을 지피는 요인이 된다.
대학생 박모 씨(24)는 지난해 말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에 관한 논쟁에 끼어들었다가 욕설을 들어야 했다. 해당 커뮤니티는 진보적인 젊은층이 많이 모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씨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한 연임, 수많은 양민학살 등 비판받을 부분은 있지만 당시 시대적 특수성을 고려해 공과를 평가해야 한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글을 올린 뒤 5분도 지나지 않아 박 씨의 글에는 욕설로 가득한 댓글이 달렸다. “역사의식이 없는 수구꼴통”이라는 말부터 “혹시 일베충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다. 누군가 박 씨가 두 달 전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법에 대해 문의한 글을 찾아내 “견찰(경찰을 비하하는 말) 노릇 하려는 걸 보니 왜 저런 말을 했는지 알겠다”며 비꼬기도 했다. 박 씨는 “이야기를 나눠보지도 않고 사람을 매도하는 게 파시즘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온라인 논쟁은 자칫 ‘내 생각과 다르면 틀린 것’이라는 성급한 판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오프라인 토론과 달리 대화가 연속적으로 이어지기 힘든 데다 익명의 공간에서 다투다 보니 표현도 과격해지기 쉽다.
주부 김모 씨(28)는 네이트판에 올라온 결혼비용 관련 상담글에 댓글을 달았다가 ‘김치년’이라는 욕을 먹었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결혼한 김 씨는 남의 일 같지 않았기에 진심을 담아 “실제로 결혼해 보면 돈이 훨씬 많이 든다. 남자친구가 계속 결혼 예산에 고집을 피운다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는 글을 남겼다. 이내 악플러들이 막말을 쏟아내더니 결국 “한국의 나이 든 여자들은 별 수 없다”는 식의 글로 마무리됐다. 논쟁의 본질과 상관없이 성 대결만 남았다.
정진욱 인터넷윤리실천협의회장은 “상대가 베일에 가려진 온라인 공간일수록 ‘나와 다름’을 인정하는 톨레랑스(관용)가 필요하다”며 “그런 준비 없이 이어지는 온라인 토론은 자칫 논점에서 벗어나 성별, 출신 등을 놓고 맹목적 비난을 쏟아내는 막말전쟁으로 흘러가기 십상”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