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실에까지 퍼지는 “그그” “유유” “느느”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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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세상을 바꿉니다]<3>키보드 위의 언어폭력
사이버 나쁜말, 밖에서도 쓰는 아이들

“아…, 싸파. 지읒리을 같네….”

초등학교 3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교사 김모 씨는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한 아이가 잘못을 해 주의를 줬더니 갑자기 생소한 은어를 쓰며 중얼거렸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다른 학생 몇몇은 한술 더 떠 “뜨끄 쩐다”라며 킥킥거리고 웃었다. 김 씨는 “욕설이 아니라 뭐라 할 순 없었지만 왠지 학생들에게 무시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아 기분이 유쾌하진 않았다”고 말했다.

인터넷 사용 연령이 낮아지면서 이젠 초등학생들도 인터넷 댓글 게시판, 게임 채팅방 등에서 활동하는 주요 ‘참여자’가 됐다. 초등학생들은 사이버상에서만 쓰던 욕설과 기이한 형태의 은어 등을 이젠 ‘밖’에서도 사용한다. 온라인상의 ‘나쁜 말‘이 일상생활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면서 문제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사이버 용어가 생활 용어로

초등학생들이 주로 활동하는 온라인 공간은 △아이돌 팬클럽 △인터넷 커뮤니티 △웹툰 연재 사이트 △포털 뉴스 기사 △게임 채팅방(겟앰프드, 메이플스토리 등) 등이 대표적이다.

초등학생들은 주로 이런 공간에서 배운 욕설 등 사이버상의 나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남용한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채팅방에는 그들이 정확한 뜻도 모르고 사용하는 욕설들이 난무한다. 특히 게임 관련 사이트에선 게임 공략 방법을 두고 논쟁 시 상대 유저에 대해 욕설을 퍼붓는 유저의 절반이 초등학생이란 얘기도 있다.

이렇게 온라인에서 배운 나쁜 말은 일상에서도 버젓이 사용된다. 대표적 유형이 파생어 형태의 비속어. 이를테면 아무 단어에 ‘개-’ ‘쳐-’ ‘똥-’ ‘돌-’ 등 접두사를 붙이거나 ‘-탱이’ 등 접미사를 결합해 만드는 식이다. 요즘엔 사이버 용어 가운데 초성 축약형 단어를 발음하기 용이하게 변형한 방식의 비속어도 유행이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 조혜은 씨는 “온라인 욕설은 누구나 쓰지만 중학생 정도가 되면 어느 정도 때와 장소를 구분해 사용한다”면서 “초등학생들은 잘못 자체를 인지하지 못해 심지어 부모, 교사 앞에서도 태연하게 쓰니 문제”라고 말했다. 한 초등학교 교사는 “일단 교사들도 초등학생의 사이버 용어 뜻을 모른다. 그러다 보니 쓰지 말라고 규제하거나 어떤 방향으로든 지도하기조차 힘든 실정”이라고 말했다. 기이한 형태로 발음되는 초성 축약형 사이버 용어를 눈앞에서 들으면 일단 당황스러워 대책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는 얘기다.

○ 잘못 배운 언어습관의 후유증

초등학생들은 왜 온라인상 나쁜 말을 일상에서까지 사용할까.

일단 또래 소통의 핵심이라는 게 이유다. 친구들과 얼굴 보며 얘기하는데 혼자 점잖게 말하면 왕따를 당하기 쉽다는 것.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온라인상 어른들과 소통하기 위해 배운 말을 일상에서 사용하면 오히려 어른스러워 보일 것 같아 쓴다는 말까지 나온다. 초등학교 3학년 이모 군은 “‘초딩’처럼 보이기 싫어 쓴다”면서 “그냥 그렇게 쓰면 멋있어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공격성을 표출하기 좋아 쓴다는 것도 한 이유. 아동청소년상담센터 ‘맑음’의 한미현 상담실장은 “요즘 초등학생들은 10년 전과 비교해도 매우 충동적이다. 욕설과 축약어로 대표되는 온라인 용어는 그러한 충동성과 공격성을 표출하기에 적절한 형태”라고 말했다.

영웅심리도 있다. 초등학생의 영웅심리는 보통 성인 세계에 빨리 다가가려는 욕구에서 생겨나는 것. 온라인에서 배운 성인들의 언행을 따라 하며 ‘나도 어른’이란 내적 자아를 형성한다는 얘기다.

낮은 자존감을 가진 초등학생이 욕설을 많이 배우게 되는 초등학교 고학년 시기에 접어들면 일상생활에서 욕설이나 사이버 용어를 쓰는 데 집착할 수 있다. 한국심리상담센터 강용 원장은 “아이들이 자존감이 낮을수록 억압된 감정을 인터넷 댓글이나 일상의 언어로 표현하는데 성인보다 자제력이 낮고 윤리의식이 없어서 문제”라고 말했다.

카카오톡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또래 친구들과 사이버 용어로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도 한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학부모 최미경 씨는 “아이가 스마트폰을 쓰기 전까지는 축약된 비속어를 잘 쓰지 않았는데 친구들과 SNS를 시작하고서 언어습관이 많이 바뀌었다”며 “이제는 오히려 아이에게 무슨 뜻인지 묻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학교 현장의 일선 교사들은 “사이버상에서 비롯된 잘못된 언어는 초등학생들이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정확한 지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초등학교 교사 김순명 씨는 “요즘 학생들이 단순한 욕설 몇 개와 축약된 사이버 용어를 사용해 대화하니 2, 3년 전 학생들보다 표현력이 떨어진 것 같다”며 “간단하고 단순한 감정 표현에만 익숙하지, 복잡한 감정이나 주어진 상황을 적절히 묘사할 수 있는 능력이 뒤처져 심각한 문제”라고 언급했다.

전주영 기자 aimhigh@donga.com
#사이버 용어#언어폭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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