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이 흘렀다. 사람들은 “이제 좀 괜찮지 않으냐”고 했다. “시간이 약이다”란 위로의 말도 건넸다.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자식을 바다에, 가슴에 묻은 부모들은 “아직도 아프다”고 했다.
고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씨(71)는 “낮엔 괜찮지만 밤엔 아직도 눈물이 나온다”고 했다. 고 이용상 하사의 아버지 이인옥 씨(52)는 “자식을 어떻게 잊느냐”고 되물었다. 시간이 흘러도 치유되지 않는 가슴의 상처를 안은 이들이 어찌 이들뿐일까. 그래도 46용사의 부모들은 아픈 마음을 추스르고 우뚝 일어나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었다. ○ 아들 가슴에 묻고 ‘열혈 애국 어머니’로
“우리 아들 덕에 내 나라 소중한 건 알게 됐지.”
주름진 손가락으로 짐가방을 쓰다듬었다. 충남 부여에서 올라와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있는 큰아들 민광기 씨(44) 집에 머물던 윤청자 씨를 17일 만났다. 윤 씨는 여름옷들만 추려 짐을 꾸리고 여행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목적지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윤 씨는 “원래 어디 있는 나라인지, 어떤 나라인지도 잘 몰랐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에티오피아행은 에티오피아의 6·25전쟁 참전용사들을 돕기 위한 후원금 2000만 원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스스로를 “시골에서 농사만 짓고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70대 할머니는 어느새 ‘열혈 애국 어머니’가 돼 있었다. 윤 씨는 2010년 4월 29일 경기 평택시 포승읍 해군 제2함대사령부 안보공원에서 열린 천안함 46용사 영결식 때 강기갑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를 향해 “의원님, 북한에 왜 퍼주십니까. 쟤들이 왜 죽었습니까. 이북 ×들이 죽였어요”라며 울부짖어 많은 이의 심금을 울렸다. 또 유족 보상금 중 1억 원을 방위성금으로 기부해 해군이 K-6 기관총 18정(3·26 기관총)을 사도록 했다. 2010년 설립된 천안함재단의 자문위원도 맡고 있다.
윤 씨는 천안함 사건 뒤 ‘내 아들이 왜 죽었는가’란 의문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고 했다. “내 아들이 죽기까지 하며 지키려 했던 대한민국이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았지.”
이번 에티오피아 방문도 아들을 보낸 뒤 생긴 불면증에서 비롯됐다. 잠이 오지 않는 긴긴 밤, TV를 보던 윤 씨는 에티오피아가 6·25전쟁 때 보병 6037명을 파병하며 아프리카 국가 중 유일하게 한국을 도운 국가임을 알게 됐다. “그때 그분들 아니었으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편하게 살 수가 없잖아…. 나는 6·25를 겪은 사람인데 그 도움이 얼마나 큰지 잘 알지.”
지난해 겨울부터 에티오피아를 돕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 온 윤 씨를 큰아들이 도와줬다. 민 씨가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과 연계해 에티오피아 방문을 주선한 것이다. 고령이시니 건강을 생각해 성금만 보내라는 아들의 만류에도 어머니는 단호했다.
“내가 여태 살 수 있었던 건 국민들이 보내준 성원 덕분이야. 그래서 살 수 있었어. 에티오피아 사람들 중에도 6·25 파병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있을 것 아냐. 이제는 내가 가서 그분들께 감사하다고 인사하려는 거야. 그 마음 누가 알아주겠어.”
18일 출국했다가 성금을 전달하고 23일 귀국한 윤 씨는 전화 통화에서 “죽기 전에 다녀와 홀가분하다”며 “성금은 향후 참전용사들의 병원비와 장례비, 참전용사기념회관 수리 비용 등으로 쓰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지금도 어디선가 ‘아빠’하고 부를 것 같아”
윤 씨가 에티오피아로 출국한 18일, 이인옥 씨는 평택 해군 2함대를 찾았다. 천안함 앞에 선 이 씨는 “평택 나들목을 지날 때마다 마음이 찡하다”면서 “지금도 어디선가 용상이가 ‘아빠’ 하고 부를 것 같다”며 고개를 숙였다.
육군을 나와 해군에 대해 전혀 몰랐던 이 씨 역시 4년 전 사건 이후 해군에 대해선 ‘준전문가’가 됐다고 씁쓸히 웃었다. 이용상 하사는 두 번 떨어지고도 세 번 도전한 끝에 갈 정도로 해군에 대한 애정이 컸다. 사고 당시엔 제대를 한 달하고 6일 남겨두고 있었다.
이 씨는 천안함 폭침 6일 전 모친상을 당했다. 불과 일주일 사이 어머니와 아들을 다 잃은 슬픔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었지만 자식을 가슴에 묻은 아픔은 상상 이상이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면 불효겠지만…. 1년이건, 4년이건 엊그제 일 같아요. 자식 잃은 슬픔은 영원하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아요.”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이번엔 막내아들 상훈 씨(20)가 해병대에 입대하겠다고 나섰다. 큰아들을 바다에서 잃었는데 또 바다라니. 이 씨와 아내는 ‘못 간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막내는 ‘형과 한 약속’이라고 부모를 설득했다. “막내가 ‘형이 해군이니 난 해병대를 가겠다’며 형과 약속했다고 하더라고요. 그걸 말릴 수 있나요.” 그렇게 올해 1월 20일 입대한 막내를 3월 초 해병대 교육훈련단에서 만났단다. “아주 늠름해졌더라고요. 허허.”
이 씨는 천안함46용사유족협의회 회장을 맡으며 여러 차례 언론 보도에 이름과 얼굴이 소개된 바 있다. 그런 이 씨에게 아직도 주변에선 “그런데 천안함…. 그거 진짜 북한 어뢰 맞아요?”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턱턱 막힙니다. 내가 뭐라고 해야 하나요. 여기 평택에 와서 천안함을 한 번 보고, 한밤중에 무방비 상태로 당한 이 증거물들을 보라는 말밖엔….” 이 씨의 눈시울이 끝내 벌겋게 달아올랐다.
해군 2함대 내에 꾸며진 서해수호관. 매일 2000여 명이 찾는 이곳 2층엔 천안함 46용사의 사진과 유품들이 전시돼 있다. 모두 가족들이 엉엉 울며 아들과 남편의 이름이 잊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부한 유품들이라고 했다. 이용상 하사 사진 아래엔 평소 차던 검은 시계와 도장, 운전면허증과 검은 정복이 놓였다.
“우리 아들이 영웅이지 내가 영웅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내가 똑바로 살지 않으면 우리 아들 이름에 먹칠할 것 같아요. 부모로서 할 도리를 하고 살자. 지금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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