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코리아 프로젝트 2년차/준비해야 하나 된다]
[탈북자에서 한국인으로]<4>의사고시 합격한 최석하씨
《 9월로 예상했던 의사시험이 11월에 시행된다는 소식에 그만 눈물이 쏟아졌다. 북에서 넘어온 55세의 만학도에겐 그만큼 하루가 아쉬웠다. 2008년 북에서 넘어 온 최석하(가명·59) 씨는 남으로 내려와 처음 눈물을 흘린 2010년의 그날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한다.(그동안 한국 언론에 공개된 적이 없는 최 씨는 북한에 남겨진 친인척을 고려해 ‘가명을 써달라’고 요청했다.) 》
그러나 그해 시험에 낙방했고 ‘의사시험 합격’의 꿈은 1년 뒤에야 이뤄졌다. 그 사이 일당 6만 원을 받는 막노동, 화장실 청소 등을 하며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했다. 그는 현재 충남 지역의 한 병원에서 제2원장(일종의 부원장 격)으로 일하며 신경외과와 정형외과 진료를 맡고 있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는 데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 차이는 없더라”며 “부단히 노력하면 북한 사람도 얼마든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넘어질 때도 책에서 눈 떼지 않아”
북한에서 40년간 신경외과 전문의로 일하다가 아내와 함께 한국행을 선택한 최 씨. 한국에 정착한 직후인 2008년 12월 그의 현실은 암담했다. 의사 경력을 활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당장 먹고살 일을 찾아야 했다. 매일같이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다. 탈북자라는 편견 때문에 일거리도 제일 나중에야 돌아왔다. 도로의 보도블록 정비 등 어떤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개 수수료에 교통비 빼고 나면 5만3000원 정도 손에 쥐었습니다. 적은 돈이었지만 그나마 살림에 보탤 돈을 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습니다.”
다달이 수입이 있는 직업을 찾다가 집에서 수십 km 떨어진 골프연습장에서 매달 100만 원을 받으며 화장실 청소를 했다. 불투명한 미래는 항상 그를 불안하게 했다. 안정된 직업을 갖기 위해선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굴착기 운전사에 도전했다. 나이를 생각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내 2010년 1월 굴착기 업체에 취직했다. 신입사원 30여 명과 함께 받은 3개월 교육과정을 수석으로 마쳤다. 한국에 들어온 뒤 처음 맛본 성취였다.
도전은 계속됐다. 한국에서도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2만5000명이 넘는 탈북자 가운데 의료 경력이 있는 사람은 수백 명이었지만 이들 중 의사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그때까지 10여 명에 불과했다. 최 씨가 한국에서도 전문의가 되려면 먼저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한국 의학서적을 사서 용어도 낯선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오전 4시에 일어나 공부했다. 36m²(약 11평)의 작은 집에서 그 시간에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은 화장실밖에 없었다. 동이 트면 낡은 자전거를 타고 집에서 4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에 가서 오전 7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발을 헛디뎌 넘어질 때도 책을 봤습니다. 도시락 하나를 점심과 저녁으로 나눠서 먹었죠. 힘들었지만 식당 종업원 일을 하며 뒷바라지하는 아내를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 환자가 내 부모라는 생각으로
그렇게 2010년 6월부터 공부한 지 한 달 만에 의료 경력이 있는 탈북자 대상 ‘의사고시 자격 면접시험’에 합격했다. 11월 실기시험에도 합격했지만 12월 필기시험에서 생소한 한국 의료법규 문제가 걸림돌이 됐다. 결국 탈락이었다. 포기하지 않았고 재수 끝에 합격했다. 최 씨는 아내를 부둥켜안고 한국에서의 두 번째 눈물을 흘렸다.
그 뒤 최 씨는 지방의 보훈병원에서 6개월간 인턴생활을 자처했다.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은 아니었지만 한국 의료체계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최 씨는 “20대도 견디기 녹록지 않은 인턴생활이라지만 그 벽을 넘고 싶었다”고 말했다. 진료과목도 신경외과(북한에서의 전문 분야)에서 정형외과로 바꿔 새로운 도전을 했다. 이후 충북 진천 등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일하다 홈페이지에 난 지금 병원의 제2원장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해 200 대 1의 경쟁률을 뚫었다.
최 씨의 진료시간은 매일 오전 8시 반부터 오후 6시 30분까지지만 1∼2시간 늦게 퇴근하는 경우가 많다. 환자마다 세심하게 진료하다 보니 최 원장에게 진료받고 싶어 하는 환자가 많아져서다. 점심을 거르는 날도 많았다.
“환자를 내 부모와 형제라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하나라도 더 살펴보게 되죠.”
최 씨의 이런 노력 덕분에 3개월 만에 병원의 일일 진료환자가 250명에서 400여 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 “죽는 순간까지 도전하고 싶다”
그는 요즘도 오전 4시에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최 씨는 “러시아어와 라틴어로 돼 있는 북한 의학용어와는 달리 남한은 영어 의학용어가 많아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전문의에 도전해 논문 등으로 남북한 의료 격차를 줄이는 데 기여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는 “남한 사회는 노력만 하면 기회는 얼마든지 열려 있다”며 “죽는 순간까지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밝혔다. “높은 벽을 만날수록 더 큰 의지가 생겨난다”는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통일을 위해서는 북한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남북한 간에는 차이도 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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