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평(약 50m²) 남짓한 공간. 무대 가운데의 테이블 위에 화려한 불빛이 쏟아진다. 시간은 업계에서 ‘프라임 타임’이라 불리는 오후 8시.
무대 바깥의 스태프가 쫙 편 손가락을 하나씩 접는다. 5, 4, 3, 2, 1, 0. 방송 시작을 알리는 경쾌한 음악이 흐르자 무대에 선 쇼핑호스트와 출연자가 1초도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간다.
“원료가 아무리 좋아도 만든 지 오래되면 그건 말짱 도루묵 아닙니까. 그런데 이건 지난주에 만든 제품이에요. 가뜩이나 신선한 제품을, 소포장으로 보내드리니 더욱 좋죠.”
방송이 시작된 지 5분 30초가 지났다. 쇼핑호스트는 시연 제품의 포장을 뜯어, 스테인리스 그릇에 우르르 쏟는다. 그는 새끼손가락 한마디만 한 알갱이를 집어 들며 말한다.
“제가 먹습니다. 제가 확실하게 먹습니다. 개밥 먹는 쇼핑호스트, 인터넷에서 보셨죠? 그게 접니다.”
개 사료 여섯 알이 입안으로 쏙 들어간다. 출연자가 옆에서 거든다.
“우리 아이들(반려동물) 먹일 거니까 쇼핑호스트가 직접 먹어봅니다. 이 정도 보여 드리면 확실하게 믿고 따라오실 수 있겠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무대 왼편 모니터링 화면에 찍히는 분당 판매량 그래프가 꿈틀대기 시작한다. 1분당 50∼53개였던 자동주문전화 주문량은 순식간에 134개까지 치솟는다.
살찐 뱃살까지 공개
“흙으로 만든 소스에 연어를 찍어 먹는 맛이랄까요? 처음엔 비린내 때문에 방송인데도 웃음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지난달 28일 만난 현대홈쇼핑 쇼핑호스트 심용수 씨(34)는 ‘맛이 어떠냐’는 질문에 쾌활하게 웃어보였다. 쇼핑호스트 5년 차인 그는 이날까지 세 번째 반려견 사료 판매방송을 하면서 매번 개 사료를 먹었다. 그가 ‘개사료 시식’을 감행한 이유는 간단하다. 매출을 위해서다.
홈쇼핑에서 반려견 사료를 선보인 것은 현대홈쇼핑이 처음이다. 선례가 없으니 성공 여부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기획회의에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토론 끝에 ‘직접 먹는 모습을 보여주자’는 아이디어가 채택됐다. 1월의 첫 방송에서 제품은 목표를 18% 초과 달성하며 2억5000만 원어치나 팔려나갔다.
국내에 쇼핑호스트(CJ오쇼핑·롯데홈쇼핑은 쇼호스트로 호칭)란 직업이 생긴 지도 20년이 됐다. 이들은 그동안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진화를 거듭했다. 동아일보 취재팀은 국내 4개 홈쇼핑 업체(CJ오쇼핑 GS샵 롯데홈쇼핑 현대홈쇼핑)의 쇼핑호스트 11명을 만나 그들만의 치열한 삶과 애환을 들여다봤다.
초창기 수십 명에 불과했던 쇼핑호스트는 이달 말 현재 6개 업체 241명에 이른다. 이 중 대부분(78%·189명)이 여성이고 가장 많은 연령대는 단연 30대(61%·147명)다. 한 업계 관계자는 “주요 고객인 30대 여성들과 공감대가 많은 사람들을 주로 쓴다”고 말했다.
쇼핑호스트들은 매출을 늘리기 위해 파격적인 시도도 서슴지 않는다. 이혜진 씨(36·여·현대홈쇼핑)는 2009년 ‘차고만 있으면 배에 열이 나는 벨트’ 방송 중 직접 자기 뱃살을 공개했다. 보여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잡고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방송 중에 배가 더 나와 보이게 하려고 3일 전부터 폭식을 했어요. 방송 직전에는 우동이나 라면을 한 사발씩 먹었죠.”
방송 안 할 때도 바빠
조명을 받으며 일하는 생활은 화려해 보인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CJ오쇼핑의 동지현 씨(42·여)는 “하다못해 무대 조명도 쇼호스트를 빛나게 해주는 용도가 아니다. ‘조명발’을 가장 잘 받아야 하는 건 바로 제품”이라고 말했다.
어떤 업체들은 반지를 끼거나 팔찌나 시계를 차는 것을 금하기도 한다. 제품과 손이 함께 화면에 클로즈업 됐을 때 시청자의 시선을 분산시킨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유일의 60대 쇼핑호스트인 이애경 씨(61·여·CJ오쇼핑)는 “지금은 결혼반지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쇼핑호스트의 일과는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전날 야간과 다음 날 새벽 방송이 계속해서 이어질 때면 하루에 2, 3시간밖에 자지 못한다.
방송을 하지 않을 때도 일정은 빡빡하다. 회의를 하거나, 업체 사람들을 만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제품을 직접 살펴보러 현장으로 떠난다. 롯데홈쇼핑의 ‘부부 쇼호스트’인 성민기(37)·김지애 씨(38·여) 부부는 이달 초 리조트 숙박권 판매 방송을 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전국의 리조트를 순회하기도 했다.
집안일이나 친구들을 챙기는 것도 쉽지 않다. 김지애 씨는 “제일 친한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난 지 2년이 넘었다.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17년 차 ‘고참’인 이진아 씨(43·여·GS샵)는 “고정으로 6, 7년 동안 주말 방송을 담당하던 때에는 가족과 주말을 보낸 적이 거의 없다”고 했다.
치열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꾸준한 자기 계발이 필요하다. 롯데홈쇼핑에서 패션 잡화 상품을 맡고 있는 이수정 씨(38·여)는 패션분야의 전문지식을 쌓기 위해 2008년 패션산업 실무자 과정을 수료했고 2009년에는 서울대 의류학과에서 패션산업 최고경영자과정 수업을 들었다. 이 씨는 “어려운 패션 지식을 일반 시청자들에게 쉽게 풀어주려면 공부는 필수”라고 말했다.
이창우 GS샵 쇼핑호스트 팀장(44)은 평소 동료 쇼핑호스트들과 함께 동아비즈니스리뷰(DBR) 같은 경영전문잡지나 여러 경제연구원의 분석 자료를 돌려본다. 산업계의 흐름과 소비자의 움직임을 파악하기 위해서다.
쇼핑호스트들의 ‘작두’ 타기
쇼핑호스트들은 ‘저승사자’로 불리는 사내 심의팀이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지적을 피하기 위해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한다. ‘최고’ ‘최초’ 같은 최상급 표현은 문서를 통해 검증되지 않은 사실이면 쓰지 않는다. 소비자들이 흔히 거짓말로 오해하는 ‘매진’이라는 단어도 실제 잔여 수량이 ‘0’으로 확인된 다음에나 쓸 수 있다. 이들은 아슬아슬하게 심의를 피하는 것을 두고 ‘작두를 탄다’고 말한다.
사실 초창기 쇼핑호스트의 세계는 지금과는 달리 다소 엉성했다. 동지현 씨는 “2000년대 이전에는 집에 케이블TV가 나오지 않아 홈쇼핑 방송이라는 걸 한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 쇼호스트로 입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진아 씨는 “1990년대에는 방송용 샘플이 확보가 안 돼 급하게 방송 상품을 바꾸거나, 집에 있는 살림살이를 소품으로 동원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공채 경쟁률은 200 대 1을 가뿐히 뛰어넘는다. 쇼핑호스트 과정을 교육하는 학원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업 특성에 맞는 쇼핑호스트를 적극적으로 찾거나 새로운 인물을 기용해 신선한 느낌을 주려는 시도도 많다. 올해 1월 GS샵에 공채 쇼핑호스트로 입사한 최은희 씨(37·여)가 그런 경우다. SBS 공채 개그우먼 출신인 최 씨는 빠르면 5월 홈쇼핑 데뷔 방송을 한다. GS샵은 최 씨가 방송인으로 이미 검증받았다는 점, 패션이나 뷰티 분야에 잘 어울릴 것이라는 점 등을 높이 평가해 합격시켰다.
성민기·김지애 씨 부부는 ‘부부를 함께 방송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업계의 관행을 깨고 주로 가족들의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하는 주방가구나 가족여행상품 판매방송에 기용돼 성공을 거뒀다. 2012년에는 1시간 동안 40억 원의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억대 연봉자는 소수
쇼핑호스트들의 희비는 실적에 따라 뒤바뀐다. 연봉 수준은 당연히 매출에 따라 달라진다. 김지애 씨는 “13명이 함께 입사했지만 10년이 넘은 지금 남은 사람은 5명뿐”이라며 “제 발로 나간 사람도 있지만 이른바 ‘잘린’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대부분 이유는 당연히 매출 부진에 있었다.
억대 연봉에 대한 환상도 과장된 측면이 있다. 쇼핑호스트들은 보통 1년 차 때 3000만∼5000만 원의 연봉을 받고 그 다음 해부터 실적에 따라 재계약을 한다. 연봉이 1억 원을 넘는 사람들은 ‘스타 ’로 꼽히는 몇몇 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모두 “내 일을 사랑한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동시에 “말도 못하게 힘들다”는 고충을 덧붙였다. 류재영 씨(39·CJ오쇼핑)는 “쇼호스트를 꿈꾸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은 쇼호스트가 돈 많이 버는 연예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이 가장 즐거운 순간은 언제일까. 심용수 씨의 말이다.
“‘콜 그래프’(주문전화 실적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다다닥’ 치고 올라갈 때 희열을 느끼죠. 크으…. 사람들이 제 말을 경청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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