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 넋 떠도는 日 외딴섬… 바람도 울고넘는 ‘아리랑고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일 03시 00분


[한-일 애증의 현장을 찾아/1부:갈등과 충돌]<上>오키나와 아카 섬
당시 밥해주던 90세 日人 할머니

“저기가 아리랑 고개” 가네시마 기쿠에 할머니가 70년 전 오키나와로 끌려 온 조선인 위안부 언니들이 매일같이 고향을 그리며 아리랑 노래를 불렀던 아리랑 고개를 가리키고 있다.
“저기가 아리랑 고개” 가네시마 기쿠에 할머니가 70년 전 오키나와로 끌려 온 조선인 위안부 언니들이 매일같이 고향을 그리며 아리랑 노래를 불렀던 아리랑 고개를 가리키고 있다.
가네시마 기쿠에(兼島きくえ·90) 할머니는 조그만 밭 옆으로 하얀 길이 이어진, 저만치 떨어져 있는 고개를 가리켰다. 고갯마루까지 느릿느릿 걸어서 10분이면 닿는 그곳을. 그리고 나직하게 말했다.

“조선인 위안부 언니들은 일이 없는 낮 시간이나 쉬는 날에는 늘 저 고개에 올라가 노비루(달래)를 캐며 아리랑을 불렀어요. 날이 저물 때까지 쉬지도 않고 계속 불렀어요. 애처로운 가락이었죠. 마을 사람들도 언제부턴가 저 고개를 아리랑 고개라고 부르기 시작했어요.”

지금은 억새와 이름 모를 열대 식물만 무성한 고개. 그 너머 북쪽 바다 저 먼 곳엔 ‘언니’들의 고향, 조선 땅이 있을 터였다.

지난달 23일 찾은 아카(阿嘉) 섬. 일본 오키나와 나하(那覇) 항에서 서쪽으로 43km, 고속 페리로 50분이면 닿는 작은 섬(3.82km²)이다. 하얀 백사장과 산호초, 옥빛 바다가 어우러진 주민 300여 명의 섬 마을은 벌써부터 한적한 여름 휴양지 모습이었다. 스쿠버다이빙을 하기 위해 찾아온 청춘 남녀들은 깔깔깔 웃으며 마을 골목길을 지나고 있었다. 이 섬에 구슬픈 ‘아리랑 고개’가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평화로움이었다.

○ 아리랑 고개에 적신 눈물

아카 섬은 69년 전 미국이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오키나와 전쟁이 시작된 곳이다. 1945년 3월 26일 오전 8시 4분. 미군은 이 섬에 상륙해 교두보를 마련했고 오키나와 본토로 진격했다.

미군의 진격에 앞서 일본은 이 섬에서 자살 특공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해안 곳곳에 굴을 파 120kg의 폭탄 2개를 싣고 적 함선을 향해 돌진할 소형 보트들을 감춰뒀다.

1944년 11월.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 7명이 특공 부대와 같은 배를 타고 이 섬에 발을 디뎠다. 마을 동쪽 어귀 ‘난푸소(南風莊)’라고 이름을 붙인 민가 2곳에 4명, 3명씩 수용됐다. 일본군이 마을에서 가장 큰 빨간 기와지붕이 얹혀진 집을 몰수해 위안소로 사용한 것이다.

“하얀 얼굴이 너무 예뻐 마을 남자들의 혼이 나갈 정도였죠. 위에는 하얀 조선 저고리, 밑에는 ‘몸뻬’ 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맏언니는 30세, 막내는 18세였어요. 막내는 일본말을 아예 못했죠. 25세이던 둘째 언니는 조선에 아들과 남편이 있다며, 보고 싶은데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울었어요.”

위안부들에게 세끼 밥을 해줬던 가네시마 할머니는 느리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당시를 회상했다.

민박집을 운영하는 신조 요시코(新城美子·81) 할머니는 당시 11세였다. 어른들이 난푸소 근처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지만 호기심을 누를 수 없었다. 아버지와 함께 지냈던 남태평양 트루크 섬(현재 미크로네시아연방 추크 섬)에서 조선인 징용자들로부터 배운 아리랑 실력도 뽐내고 싶었다. “난푸소 근처에서 아리랑 노래를 부르자 언니들이 모두 귀엽다며 머리를 만져줬어요. 이후론 매일 갔어요.”

“여기가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에 의해 위안소로 사용되던 난푸소 건물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군은 민가를 몰수해 위안소로 사용했다. 이 같은 
현장이 계속 확인되고 있는데도 아베 신조 내각은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며 한일 간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아카 
섬=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여기가 일본군 위안소” 일본군에 의해 위안소로 사용되던 난푸소 건물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일본군은 민가를 몰수해 위안소로 사용했다. 이 같은 현장이 계속 확인되고 있는데도 아베 신조 내각은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인하며 한일 간 갈등의 골을 더욱 깊게 만들고 있다. 아카 섬=배극인 기자 bae2150@donga.com
이 마을에는 난푸소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다. 빨간 기와지붕은 슬레이트로, 나무판자로 지어졌던 벽과 집 현관을 가리는 병풍만 콘크리트로 바뀌었을 뿐이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저 문 안에서 조선인 여성들은 밤마다 가족을 그리며 눈물을 삼켰을 것이다.

조선인 위안부 7명은 이곳에 온 지 3개월 만인 1945년 2월 오키나와 본토로 이송됐다. 이후 대부분이 포탄이 쏟아지는 오키나와 들판에 버려진 채 최후를 맞거나 행방불명됐다. 마을 주민 한 명은 10여 년이 지난 뒤 오키나와에서 살아남은 한 명을 목격했다고 전했다.

○ 전쟁 물자였던 조선인 위안부

일본 정치인들의 거듭되는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들을 직접 관리했다는 증언은 이 섬에 수두룩했다. 특공대원으로 아카 섬에 파견됐던 후카사와 게이지로(深澤敬次郞) 씨는 2004년 펴낸 ‘선박 특공의 오키나와전과 포로기’라는 책에서 “내가 처음 위안부를 본 것은 1944년 10월 하순으로 가고시마에서 오키나와로 향하는 수송선 안에서였다”며 “왜 많은 여성이 오키나와로 가는지 몰랐는데 중대장이 이들은 위안부라며 말을 걸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장교와 하사관들만 위안소를 이용했다”고 증언했다.

당시 위안부로 끌려간 조선 여성들은 부산에서 가까운 시모노세키(下關)에 일단 집단 수용된 뒤 일본군의 필요에 따라 전쟁 물자처럼 수송선으로 각지에 실려 나갔다. 일본군은 특히 오키나와 결전을 앞두고 조선인 위안부를 오키나와 본토와 주변 각 섬으로 대거 끌고 갔다. 이 가운데 살아남았던 배봉기 할머니(1991년 77세로 작고)가 1972년 오키나와 본토가 일본에 반환되는 과정에서 불법 체류자로 오키나와에 머물러 온 이유를 최초로 증언하면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가네시마 할머니의 증언은 보다 생생했다. “군의 요청에 따라 마을 구초(區長·이장)가 밥해줄 사람을 찾아서 제가 하게 됐어요. 쌀이나 된장 등 식량은 모두 군에서 받았어요. 매주 금요일엔 군의사가 여성들을 검사했어요. 난푸소는 당연히 군 기밀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언니들에게 한국 이름이 뭔지, 고향이 어딘지 물어볼 엄두도 못 냈어요. 뭐든 물어보면 체포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언니들도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할머니는 “언니들이 모든 것을 체념했던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남편이 전사해 울고 있는 마을 아주머니에게 ‘우리도 모두 이 섬의 흙이 될 것이다. 모두 같은 신세니 안 울어도 된다’며 위로를 하기도 했어요.”

가네시마 할머니에게 70년 전 불과 3개월간 같이 있었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언니들에게 배운 노래도 아직 기억하고 있다며 수줍게 웃었다. 곡을 청하자 아리랑 고개를 바라보며 가냘픈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도게(고개)로 넘어간다∼.” 흰 나비 한 마리가 주위를 나풀거렸다.  

▼ 아카 섬엔… 조선인 軍인부 350명 恨도 서려 ▼
‘미군 내통’ 죄목으로 처형 당하기도… 제주4·3유족회와 매년 위령제 열어

아카 섬에서 벌어진 조선인의 비극은 위안부 문제로만 끝나지 않았다. 위안부가 섬에서 떠나자 교체하듯 섬에 들어온 이들은 ‘특설수상근무대(特設水上勤務隊)’라는 이름으로 조선에서 끌려온 군부(軍夫·군 인부) 약 350명이었다. 이들에게는 무기가 지급되지 않았다. 특공 작전을 위해 보트를 옮기고 참호를 파는 게 주된 일이었다.

1945년 3월 26일 미군이 이 섬에 상륙하자 산으로 도망간 일본군은 조선인 군부 학살을 자행했다. 식량을 구하러 다녀온 이들에게 미군과 내통했다는 죄목을 씌운 것이다. 최소 12명이 처형됐다. 살아남은 군부들은 처형된 동료를 묻을 구덩이를 팠다.

아카 섬의 비극이 밝혀진 것은 이번 취재에 동행한 나가타 이사무(長田勇·66) 씨의 노력 덕분이기도 했다. 오사카 JR니시 노조 간부로 ‘오키나와에서 배우고 행동하는 모임-혼백회’ 활동을 해오던 그는 2006년 처음 이 섬을 찾았다가 이런 비극을 알게 됐다. 이후 섬 주민들의 증언을 하나하나 모았고 비극의 현장을 모두 규명해냈다. 2010년부터는 ‘제주 4·3희생 유족회’와 함께 해마다 아카 섬에서 아리랑 평화음악제와 위령제를 열고 있다.

아카 섬=배극인 특파원 bae2150@donga.com
#아카섬#아리랑 고개#오키나와 아카#위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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