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낮 12시 반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한 초등학교 앞. 1학년 하교시간이 다가오자 엄마들 40여 명이 모여들었다. 교문 건너편에는 영재학원, 레고학원, 영어학원, 태권도학원 통학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얼마 후 인근의 다른 초등학교 앞. 자녀가 나오길 기다리는 엄마들 사이에선 “학교에서 축구를 너무 많이 시켜서 집에서 공부할 때 애가 피곤해한다” 등 아이 교육에 관한 이야기가 주로 오갔다. 이들이 자녀를 데리러 온 학교 교문 앞은 고급 승용차 행렬이 줄을 이었다. 학부모 차 30여 대가 몰린 교문 앞 도로는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엄마의 승용차에 오르거나 학원차로 발걸음을 옮겼다.
○ 사교육과 부모의 욕심, 자녀 불행 키운다
2일 동아일보 취재팀의 심층 설문조사에 응한 초등생 194명은 1인당 평균 학원 3곳을 다닌다고 답했다. 다니고 있는 학원 2곳 중 1곳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님 때문에 다닌다”고 했다. 아버지가 건설업체 이사, 어머니는 간호사라는 5학년 남학생 A 군은 “다니는 학원만 총 9군데”라고 말했다. A 군의 장래희망은 ‘가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역사, 영어, 수학, 농구, 원어민 영어, 기타, 드럼, 컴퓨터, 한자 학원을 다니고 주말에도 부족한 과목을 학원에서 채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행복점수(100점 만점)가 ‘10점’이라며 설문지에 그 이유를 이렇게 적었다. “하루하루가 너무 피곤하다. 친구들과 놀 시간이 없다. 부모님이 내 시험점수가 낮을 때면 슬퍼해서 어쩔 수 없다.” 그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 ‘내가 원하는 학원만 다니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들이 다니는 학원이 많을수록 행복점수도 낮았다. 194명의 평균 행복점수는 82.36점이었지만 학원을 7곳 이상 다니는 학생(13명)은 70.84점으로 10점 이상 낮았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장래희망과 진학 문제를 두고 부모와 갈등이 많았다. 부모가 원하는 특정한 대학(학과)이 있느냐는 질문에 초등학교 4학년은 39%(26명)만이 ‘있다’고 답했지만 6학년은 그 비율이 48%(30명)나 됐다. ‘있다’고 답한 경우 대부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 등 명문대나 법대, 의대 진학을 원했다.
전문가들은 부모의 사교육 욕심이 자녀의 인지적인 발달은 도울 수 있지만 정서적으로는 후퇴시킨다고 지적했다. 아이가 머리는 똑똑해지는 반면 자기 마음을 다스릴 수 없게 될 수 있다는 것. 이은경 명지대 청소년지도학과 교수는 “정서적인 발달은 아이들이 쉬고, 노는 과정에서, 또는 또래와 어울리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며 “최근 청소년들이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끝까지 반성하지 않거나, 부모의 꾸지람 등 작은 갈등에도 쉽게 자살하는 것은 정서적인 부분이 미약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는 답변의 비율도 고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높아졌다. 홍강의 한국자살예방협회장은 “초등학생 때는 마음속에 자살에 대한 욕구나 욕망이 자라고 15세 이후 그 욕구가 행동으로 표출된다”며 “이 때문에 초등학생 때 마음속의 불만 등을 치유하고 풀어주지 않으면 중고교생이 돼서 비극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 자녀의 행복 좌우하는 부모의 표정
이번 설문조사에서 특이한 점은 부모가 행복해 보인다고 응답한 학생일수록 자신의 행복점수도 높게 나타난 점이다. 부모가 행복하다고 답한 학생들의 평균 행복점수는 87.2점으로 전체 평균보다 약 5점이 더 높았다. 반면 부모가 불행하다고 답한 학생들의 평균 행복점수는 70.5점에 그쳤다.
부모가 불행하다고 답한 학생일수록 자살을 생각하는 경향이 더 높았다. 부모가 불행하다고 답한 학생 중 32%가 자살을 생각해본 반면 부모가 행복한 경우는 17%만이 자살을 생각해 봤다고 답했다.
부모가 행복하다고 답한 학생들의 이유는 이랬다. “아빠가 저녁마다 엄마 다리를 주물러준다” “내가 이야기하면 부모님이 함께 모여 웃으면서 들어주신다” “매일 아빠 엄마 표정이 밝다”…. 부모의 얼굴에 미소가 자주 보이고 자녀 앞에서 웃는 시간이 많을수록 자녀 역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학부모와 학생의 인식 차이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초등학교 5학년 자녀를 둔 이모 씨(39·여)는 “아이 아빠가 안정적인 공무원이고 나도 직장을 다녀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없다. 아이도 안정적으로 생각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녀 정모 양(12)의 대답은 반대였다. “부모님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이 내 외모를 가지고 놀려 속상해서 운 적도 있다. 부모님은 그걸 모른다.”
자녀가 중고교생이 되면 부모와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할 여지가 많지만 초등학생 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라고 무시하고 넘어가는 게 부모들의 문제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했다. 자녀가 초등학생이라도 부모가 동등하게 대화할 자세가 돼 있어야 자녀의 생각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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