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 발전소를 둘러싼 ‘원전 마피아’ 비리가 곪아 터졌던 지난해 6월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새 정부에 전가할 문제가 아니다. 과거 정부에서 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는지 밝혀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정부는 과거 정부와 다르다’는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침몰 사고 수습 과정을 지켜본 국민들의 분노를 피해 가기 어려워 보인다. 박 대통령이 취임 초부터 강조했던 ‘국민 안전’ ‘부처 협업’ ‘투명한 정보 공개’의 구호가 공염불에 그쳤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화려한 구호만 난무해 온 박근혜 정부 경쟁력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 부처 간 협업 대신 ‘책임 떠넘기기’만
세월호 침몰 사고 실종자 가족들이 20일 청와대로 가겠다고 나선 것은 사고현장에 차려진 ‘현장정부’를 믿지 못하겠다는 강한 불신의 표현이다. 사고 발생 5일째를 맞고 있는데도 승선인 수 발표조차 오락가락하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는 국민적 거부다. 실종자가 구조자로 분류되는가 하면, 배에 타지도 않은 학생이 실종자 명단에 올라 있는 황당한 일이 반복되고 있지만 누구 하나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혼란의 연속은 컨트롤타워가 실종된 데서 비롯됐다는 지적이 많다. 박 대통령은 국민 안전을 국정 목표로 제시하며 안전행정부를 통합 컨트롤타워로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사고 초기 강병규 안행부 장관을 본부장으로 한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는 실종자 가족의 애끊는 마음을 모른 채 혼선을 부채질하는 역할만 했다. 구조자 수를 두 배 넘게 부풀렸다가 정정하는 과정에서 사과보다는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쇄도하자 이번에는 기관마다 서로 발표를 미루는 ‘칸막이 치기’에 나섰다. 박 대통령이 부처별 업무보고 때 단골메뉴로 강조해온 부처 간 협업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안행부와 해양수산부, 해양경찰청 등이 엇박자를 내자 뒤늦게 정홍원 국무총리를 본부장으로 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를 설치했지만 성난 민심을 달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박 대통령은 행정안전부를 안전행정부로 이름까지 바꾸며 국민 안전을 강조했지만 실제 안행부에 안전 전문가가 제대로 있느냐는 지적마저 나온다. 중대본 구성 초기 혼선을 자초한 이경옥 안행부 2차관을 비롯해 중대본 구성원 가운데 안전 분야 경력을 쌓은 이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안전 분야의 전문가가 없는 상황에서 체계적인 현장 관리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거듭된 대통령 지시의 ‘공허한 울림’
청와대가 가장 아파하는 대목은 초기 박 대통령 메시지가 부정확하게 나왔다는 점이다. 사고 발생 직후 박 대통령은 “해경특공대를 투입해 선실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사람이 없는지 확인해서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사태를 오판한 것으로 판명됐다. 박 대통령이 사고 초기 상황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여객선에 구조대가 진입한 것은 사고 발생 사흘 뒤였고 여전히 선체 진입을 통한 실종자 확인 작업은 더디다.
박 대통령은 ‘정부 3.0’을 내세우며 투명한 정보 공개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해경과 중대본은 구조 상황을 놓고 여러 차례 말을 바꿨다.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기보다는 ‘책임 피하기’에 급급했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이 집계 오류를 지적하자 차후 확인된 정확한 숫자까지 보고를 미뤘다는 말도 나온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여러 차례 국민 안전과 관련한 지시를 내렸다. 지난해 3월 안행부의 업무보고 때는 “안행부가 각 부처와 민간에서 보유한 방재자원을 통합, 활용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을 시급히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올해 2월 안행부 업무보고 때는 “안전수칙을 제대로 만들고, 그것을 안 지켰을 때 굉장한 책임을 느끼게 만드는 제도를 마련하라”고 주문했다.
사고 발생 8일 전인 7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는 “재난 유형별로 3000개가 넘는 위기관리 매뉴얼이 있는데, 실제 위기 상황 시 매뉴얼대로 움직이는지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박 대통령의 이런 지시가 현장에서는 ‘쇠 귀에 경 읽기’ 식으로 넘어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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