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500년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을 고르라면 대부분 단종(1441∼1457)을 꼽는다. 그는 짧은 생애를 마쳤지만 단종 비 정순왕후 송씨는 가슴에 한을 품은 채 64년을 더 살았다. 그녀의 처절한 삶의 흔적은 서울 종로구 숭인동, 창신동 일대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정순왕후는 1454년 열네 살 때 왕비로 책봉됐지만 영광의 순간은 짧았다. 남편 단종은 이듬해 상왕으로 밀려났고, 1457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면서 노산군으로 강등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됐다.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 인사를 나눈 곳은 숭인동과 중구 황학동을 잇는 청계천 다리인 ‘영도교(永渡橋)’다. 그들의 마지막 만남을 지켜본 백성들이 훗날 ‘영 이별다리’ 또는 ‘영영 건넌 다리’라고 불렀다. 지금의 영도교는 청계천 복원 때 현대식으로 다시 놓은 것이다.
궁궐에서 쫓겨난 왕후는 왕실의 도움을 거부하고 시녀 세 명과 함께 ‘정업원’이라 이름 지은 작은 초가집에서 생활했다. 현재 숭인동 청룡사 옆에 ‘정업원구기(淨業院舊基)’라고 적힌 비석이 남아 있다.
유배를 떠난 남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소복을 입고 동쪽에 있는 산봉우리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했다. 이 언덕을 ‘동망봉(東望峰)’이라 부른다. 청룡사에서 10분 정도 거리다. 여인의 한 맺힌 울음은 도성 주변을 뒤덮었다. 마을 여인네들도 왕후와 같은 심정으로 땅을 치고 가슴을 치는 ‘동정곡(同情哭)’을 했다고 전한다.
슬픔보다 지독한 현실이 엄습했다. 한때는 왕후였지만 이제는 끼니 걱정을 해야 할 처지가 됐다. 왕후와 시녀들은 옷감에 물들이는 일로 생계를 이었다. 동망산 계곡 곳곳에는 자줏빛을 띠는 풀이 많았다. 옷감을 화강암 바위 밑에서 흘러나오는 샘물에 빨아 물들인 뒤 그곳 바위들에 널어 말렸다. 청룡사에서 북쪽 기슭으로 300여 m 떨어진 원각사 옆 화강암 바위 밑에는 지금도 샘물 솟는 우물이 남아 있으며 자지동천(紫芝洞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왕후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부녀자들이 채소를 가져다주자 조정은 이를 금지시켰다. 여인네들은 오히려 여인들만 출입할 수 있는 금남의 장소인 ‘여인시장’을 만들었다. 채소를 파는 척 모여든 뒤 왕후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동망봉 남쪽 동묘 건너편 숭신초등학교 앞에 ‘여인시장터’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22일 오후 3시에는 숭인근린공원에서 ‘제7회 단종비 정순왕후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세월호 침몰 사고와 관련한 애도 분위기에 맞춰 추모제향만 경건하게 진행할 예정이다.
숭인동 골목길 관광코스를 이용하면 왕후의 아픈 삶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영도교→여인시장터→동묘→풍물거리시장→낙산묘각사→동망정→정업원 터 및 청룡사→자주동샘 및 비우당을 잇는 2시간 코스. 종로구 홈페이지(jongno.go.kr)에서 최소 3일 전에 신청하면 된다. 02-2148-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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