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69)은 인왕산(338m)자락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 그에게 인왕산은 뒷동산놀이터였다. 청와대 뒤 북악산(342m)과 남산(262m)을 바라보며 뼈와 근육을 키웠다. 인왕산 범바위 너머 말안장을 닮은 안산(296m)도 지척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중동중고등학교(현 조계사부근)를 다녔다. 목이 타면 인왕산 곳곳 샘솟는 약수터에서 벌컥벌컥 목을 축였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인왕산이었다. 그 자락에서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산이 좋아졌고, 북한산, 도봉산, 설악산도 오르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히말라야까지 올랐다. 6·25전쟁 후 인왕산은 폐허 그 자체였다. 여기저기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이들은 배가 고파 아까시 꽃을 따먹거나, 맹물로 배를 채웠다. 난 굵고 거친 삼줄을 타고 바위에 오르곤 했다. 손바닥에 피가 맺혔지만,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오월 바위에 매달려 세검정 쪽을 바라보면, 연분홍 능금나무 꽃밭에 일렁일렁 가슴이 울렁거렸다. 가을엔 붉은 감이 주렁주렁 꽃등불처럼 매달려 황홀했다. 가난했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이인정은 인왕산바위를 탈 때면 반드시 옷을 뒤집어 입었다.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올랐다. 행여 옷이 해어지거나, 신발밑창이 닳을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추석 무렵 어느 날, 송편에 쓸 솔잎을 따러 바위에 오르다가, 영화감독 홍성기 씨(김지미 씨 전 남편)의 눈에 띄었다. 마침 그곳에서 고은아-남석훈 주연의 영화 ‘처녀성’을 찍고 있었는데, 대역이 필요했다. 이인정이 딱 적격이었다. 그 인연으로 ‘상해탈출’ ‘3인의 여검객’ 등 서너 편의 영화에서 스턴트맨으로 활약했다. 수입이 쏠쏠했다. 즉각 등산용품점으로 달려갔다.
“언젠가 도봉산 만장봉에서 ‘한국의 돌’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찍었다. 난 바위를 타는 역할이었다. 감독이 ‘우측! 더 우측!’ 계속 외쳤다. 난 그 소리에 정신이 팔려 밧줄 짧은 줄도 모르고 하강을 했다. 결국 밧줄 끝에 4시간이나 대롱대롱 매달리는 신세가 됐다. 손을 놓으면 그대로 황천길. 천만다행 평일인데도 바위 타러 나온 후배가 있었다. 그가 나를 살렸다. 그 이후로 스턴트맨 생활은 그만뒀다.”
이인정은 점점 산에 빠져들었다. 중동고 시절엔 친구들과 ‘인왕클럽’이란 산악회를 만들었다. 동국대에 입학하자마자 산악부에 들어가 전국의 산을 메주 밟듯 돌아다녔다. 그가 속한 ‘누상동파’는 고난도 바윗길 코스를 개척해 이름을 날렸다. 그즈음 누군가 ‘베트남전쟁 중인 미군창고에 가면 최신 등산용품이 지천’이라는 말을 했다. 이인정은 솔깃했다. 즉각 대학휴학을 하고 베트남전쟁에 자원했다. 백마부대 병참병으로 13개월 근무했다. 부대부근에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면, 곧바로 조명탄이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부상병을 나르는 헬리콥터 소리가 악머구리 끓듯 고막을 찢었다. 문득 밤하늘에 달이 뜨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난 과연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참 어처구니없다고 할까. 무모하고 바보스럽고 우습기도 하고…. 굳이 좋게 말한다면 순수한 열정이라고 할까. 한마디로 베트남자원은 만용이었다. 도대체 전쟁은 왜 할까. 난 그곳에서 가슴에 잔뜩 상처만 입고 돌아왔다. 물론 등산장비 카라비너, 로프는 단단히 챙겼지만 TV나 냉장고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다른 동료들은 대부분 그것들을 가져와 시장에서 거액으로 바꿨다. 친구들은 날 바보라고 했다. 한심하다고도 했다. 난 베트남에서 돌아오자마자 어머니(1998년 작고)의 손을 꼬옥 잡고 인왕산 약수터 나들이에 나섰다. 문득 1·4후퇴 때 피란 중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오산까지 나와 손잡고 가던 중 유탄에 맞아 그분만 화를 입으셨다. 그 후 어머니는 7남매(이인정은 4남3녀 중 셋째아들)를 홀로 키우셨다. 그날 우리 모자는 참으로 오랜만에 달고 시원한 약수를 꿀컥꿀컥 마셨다. 어머니는 나를 보고 웃었다. 난 어머니를 보고 웃었다. 햇살이 참 따뜻했다.”
1969년 한국산악회 히말라야원정대가 조직됐다. 이인정도 당연히 그 멤버에 포함됐다. 2월 설악산 죽음의 계곡에서 겨울훈련을 했다. ‘죽음의 계곡’이라는 이름이 씨가 됐을까. 어느 날 눈사태로 계곡에서 빙벽훈련 하던 동료 10명이 눈 더미에 파묻혀 눈을 감았다. 대청봉꼭대기에서 비바크(Biwak)훈련 하던 8명만 살아남았다. 이인정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두세 달쯤 후엔가 눈이 녹자 시신발굴을 했다. 가슴뼈가 모두 으스러진 동료의 시신을 보았다. 나이프로 막 텐트를 찢고 나오려다가 눈을 감은 동료도 있었다.
“한동안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내 가슴에 묻혔다. ‘××놈! 살아남은 난 뭐냐’ 내 자신에게 수없이 묻고 또 물었다. 인간은 미물에 불과하다. 산 앞에선 겸허해야 한다. ‘등산’이 아니라 ‘입산’이다. 1976년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 네팔에 첫 발을 디뎠다. 마음이 붕 떴다. 설산에 홀려 뛰다시피 올랐다. 그러다가 고산병으로 산중턱에서 쓰러졌다. 들것에 실려 내려왔다. 난 산 앞에서 너무 촐랑댔다. 그 이후 난 70여차례 네팔을 찾았고, 그런 인연으로 2001년부터 8년간 네팔명예영사를 맡기도 했다. 난 죄가 많다. 고상돈 지현옥 고미영 박영석 김형일 서성호…. 많은 후배들을 앞세웠다. 특히 박영석은 내가 1980년 마나슬루 등반에 성공하고 김포공항에서 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펼칠 때, 그 모습을 보고 산악인의 꿈을 키운 후배였다. 당시 고교생이었던 그는 후에 내가 다닌 동국대에 들어와 산악부의 기둥이 됐다. 요즘도 그들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수면제나 우황청심환 먹고 자는 날이 많다.”
이인정은 3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다. 모두 산과 관련됐다. 요즘도 악몽을 꾸곤 한다. 바위에 매달려 아등바등하다 떨어지거나, 시험지에 이름만 써놓고 문제를 하나도 못 풀어 삐질삐질 진땀 흘리는 꿈이다. 어찌 보면 산악인들은 순수한 열정으로 뭉친 불나방인지도 모른다. 발갛게 달아오른 불덩이에 무작정 달려든다. 그중엔 ‘앗, 뜨거워!’하고 물러나는 이도 있지만, 그대로 뛰어들어 몸을 사르는 이도 있다.
“등산은 집에 안전하게 돌아와야 끝이 나는 것이다. 난 덤 인생을 살고 있다. 에베레스트에 처음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 경(1919∼2008)의 삶을 보라. 그는 평생 히말라야를 위해 살았다. 그곳에 학교와 병원을 짓고 활주로를 세웠다. 그는 1975년 부인과 막내딸을 비행기사고로 히말라야 네팔에서 잃었다. 그리고 1990년 한 여성과 재혼했는데, 그녀의 전 남편은 남극에서 비행기사고로 죽은 힐러리 경의 동료산악인이자 친구였다. 나도 베풀며 살고 싶다. 많지는 않지만 25년째 체육꿈나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있다. 지난해엔 장애인체육인 등을 위해 1억 원을 내놓았다. 난 국립등산학교를 세우는 게 꿈이다. 남북합동 히말라야원정도 이루고 싶다. 속초의 국립산악박물관은 올여름 완공된다. 지난해 가을, 친구들과 오랜만에 인수봉에 올랐다. 산은 왜 오를까. 모른다. 그냥 산에 가면 행복하다.” ▼ ‘산의 중매’로 만난 아내는 LG창업 구씨 집안의 딸 ▼ 山처럼 소중한 인연들
이인정의 결혼은 순전히 ‘산의 중매’로 이뤄졌다. 산의 섭리로 한 여인을 만났고, 함께 산을 오르내리며 사랑을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에 골인했다.
이인정은 동국대산악부 시절 신세계백화점 등산용품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시절’이었다. 그때 그의 가게에 왔던 손님이 바로 아내인 구혜정 씨(66)였다. 구 씨는 구태회 LS전선 명예회장(91)의 둘째딸. 구 회장은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씨의 동생이다. 6선 국회의원에 제9대 국회부의장(1976∼1979)을 지낸 유명정치인이기도 하다.
혜정 씨는 당시 이화여대 법정대 산악부장이었다. 처음 구 씨는 이인정을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가게점원 이인정이 ‘산 좀 탄다’고 약간 우쭐대고 툴툴대자 그게 영 눈에 거슬렸다. ‘어디 동네 건달쯤 되나보다’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끊일 듯 이어졌다. 어느 날 이인정은 당시 한국산악회장이던 노산 이은상 선생(1903∼1982)에게 불려갔다. 이 회장은 대뜸 이인정에게 ‘네가 이화여대 산악부 좀 돌봐주라’고 말했다. 졸지에 이인정은 이대 산악반 지도자가 된 것이다. 그렇게 이인정과 구혜정은 돌고 돌아 다시 만났다. 자연스럽게 오해를 풀고 ‘이 산 저 산’ 함께 쏘다니며 정을 키웠다.
“처음엔 아내 집안이 부잣집인지 아닌지 전혀 몰랐다. 관심도 없었다. 장인어른이 당시 잘나가던 국회의원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그저 북한산인수봉 도봉산만장봉 등 바위를 타며 데이트를 즐겼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처가에서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처남 한 사람이 데이트에 꼭 따라붙었다. 네 처남 중 둘째(구자엽·64), 셋째(구자명·62), 막내처남(구자철·59)이 돌아가면서 나와 누나를 감시(?)했다. 일거수일투족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다행히 큰처남(구자홍·68)은 미국유학 중이어서 나타나지 않았다. ㅎㅎㅎ 그렇지만 둘째처남은 우리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져도 슬쩍 모른 체 눈을 감아줬다. 나중에 결혼할 땐 처가의 적잖은 반대 여론을 앞장서 막아주기까지 했다. 내가 생각해도 어느 부모가 나 같은 천둥벌거숭이에게 귀한 딸을 선뜻 맡기려 할까. 난 산에 미쳐 있었다. 연애시절 아내에게 ‘학교는 그만 다니고, 앞으로는 산만 타겠다’고 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아내는 ‘만약 대학을 중퇴한다면,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어휴, 그냥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무서웠다. 난 순한 양처럼 군말 없이 학교에 다녔고, 그렇게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이인정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이다. 그에게는 양아버지, 양어머니에 양아들, 양딸이 수두룩하다. 한국스키 도입의 원로 백남홍 선생, 속초의 슈바이처 이기섭 박사,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 선생은 그가 지극히 모셨던 양아버지들이다. 가수 양희은의 모친 윤순모 여사(84)는 새해 꼬박꼬박 세배 드리는 유일한 양어머니다. 당연히 양희은(62), 양희경(60) 자매는 그의 여동생이나 마찬가지. 이들 자매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그대로 빼닮았다. 윤 여사는 유화, 퀼트, 포크아트 등 만능예술가로 이름 높다. 영화감독 이장호와는 막역한 친구, 탤런트 강석우, 가수 김세환 윤형주는 허물없는 동생이다. 산악인 김창호, 마라토너 황영조, 스키 유혜민, 양궁 이은경, 개그우먼 박미선, 송은이 등은 그의 양아들이나 양딸이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결국은 사람이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다. 사람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겠는가. 난 사람이 좋다. 누가 뭐래도 ‘사람 꽃’이 으뜸이다. 물론 내 뒤통수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엔 좋은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난 깨질 때 깨지더라도 우선 사람을 믿는다. 난 이제까지 돈 꿔주고 영수증 받은 적이 없다. 도대체 사람이 ‘성공했다’는 의미가 뭔가. 난 그 말이 가장 싫다. 사람 우습게 보는 게 최고 나쁘다. 남의 고통을 내 아픔처럼 아파해주고, 모자란 거 서로 채워주며 사는 게 사람세상 아닌가.”
이인정의 둘째아들 이상현 씨(37)는 2003년 비운동권으로 한양대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장안의 화제를 모았다. ‘LG그룹 창업주 외손자’가 51.7%의 득표율로 다른 두 운동권후보를 보란 듯이 물리친 것이다. 당시 상현 씨는 “공약과 정책으로 이겼는데, 언론에서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게 부담스럽다. 난 구씨가 아니라 (전주)이씨이며, LG그룹 주식을 단 한 주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 상현 씨는 이인정이 대표이사회장으로 있는 (주)태인의 일을 돕고 있다. 태인은 전기누전차단기와 메모리반도체 핵심부품을 만드는 회사.
“가끔 아내는 농담 삼아 ‘우리 결혼은 무효’라고 말한다. 결혼식 때 주례 이은상 선생님이‘신랑신부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영원히 사랑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대답을 안했다는 거였다. 사실 그날 아내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내가 결혼식준비를 엉망으로 했기 때문이다. 막상 식이 시작됐는데 사회자가 없어 한순간 난리가 났다. 카메라맨이나 피아노 칠 사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 정도로 난 철딱서니가 없었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이인정 약력
▽1945년 서울 종로 누상동 출생 ▽중동중-중동고-동국대 상학과 졸업 ▽동국대 대학원 무역석사(1975) ▽인천시립대 경영대학원 경영학박사(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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