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첫 내각 수장에 오른 정홍원 국무총리는 지난해 2월 8일 총리 후보자로 지명된 뒤 기자회견에서 “저는 학벌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스펙도 갖고 있지 않다”고 몸을 낮췄다. 성균관대 법대 야간 출신에 검찰총장이나 장관 같은 고위직을 지내지도 못했던 본인의 인생을 겸손하게 표현했던 것.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김용준 전 총리 후보자가 지명 닷새 만에 사퇴하면서 ‘대타(代打) 총리’에 올랐다.
박 대통령이 2012년 새누리당의 비상대책위원장이었던 4·11총선 때 정 총리는 당 공직자후보추천위원장으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박 대통령은 정 총리가 법치 확립을 중시하는 자신의 국정철학을 잘 이행할 인물로 봤다.
정 총리는 취임 후 첫 일정으로 서울 중구 정동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방문해 개인 재산으로 성금 1억 원을 전달하는 ‘나눔’을 택했다. 정부조직 개편안의 국회 처리가 미뤄지자 “민생 공백은 없다”면서 온종일 걸으며 민생현장을 챙기는 적극적인 모습도 보였다. 당시 걸었던 거리는 16km나 됐다.
정 총리는 취임식에서 “부처 이기주의나 칸막이 행정은 방치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조정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만기친람 스타일과 맞물려 ‘책임총리’로서 존재감은 미미했다는 평가가 많았다. 초기에는 박 대통령과 정기적으로 독대하며 국정에 관한 의견을 교환했으나 점점 횟수가 줄었다고 한다.
특히 지난해 12월 한국철도공사(코레일) 정상화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초기에 철도노조가 펼쳐놓은 민영화 프레임에 빠졌을 때 정 총리가 제대로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혼란을 자초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하지만 그의 낙마는 세월호 침몰 사고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리더십 부재가 결정타였다. 16일 사고 발생 당시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던 정 총리는 사고 소식을 접한 뒤 곧바로 사고현장으로 달려갔지만 실종자 가족의 물병 세례를 받았다.
박 대통령이 사고 첫날 잘못된 통계 발표로 신뢰를 잃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대신 정 총리를 책임자로 한 범정부 사고대책본부를 진도 현장에 꾸렸지만 정부에 대한 불신은 수습은커녕 더 악화됐다. 청와대 내에서도 지난주부터 더 버티기에는 국민 신뢰를 너무 잃었다는 말들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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