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아래로 쑤욱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깜깜하고,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슴이 답답해져 눈을 떴는데 옆에 웬 남자가 자고 있어 심장이 찔끔하게 놀랐다. 자는 남자는 내 남편이고, 여기는 서울 마포구의 내 집이다. 잠에서 깬 순간 진도실내체육관인 줄 알았다.
16일 오전 세월호 침몰 소식을 듣고 진도로 내려간 이래 열흘 밤낮을 체육관에서 취재하다가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영 편치가 않다. 자꾸 마음이 진도로 달려간다.
진도실내체육관에서 만난 실종자 가족들은 세월호에 탔다가 참변을 당한 아들, 딸, 손주 또는 아버지, 어머니인 실종자에게 너무나 미안해했다. 미안함이 너무 커 숨쉬는 것조차 버거워 보였다. 신원확인소 앞에서 만난 할머니는 “손녀가 마지막 통화 때 ‘할머니! 깜깜해서 아무것도 안 보여!’라고 소리 질렀다. 수학여행 때 새 신발을 사고 싶다고 했는데 그냥 흰 운동화를 빨아 신겼다”며 눈물을 쏟았다. 의연해 보이던 한 30대 아들은 “아버지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평소 ‘감사합니다’란 말을 못한 게 한이 된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옆에서 취재를 해야 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가족을 찾기 전까지 버텨야 한다는 일념으로 간신히 밥을 넘기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그들 주변의 공기는 깊은 슬픔이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옆에 가면 나도 모르게 눈물부터 나왔다. 그래도 거기 있어야 했다. 가라고 밀어내면 잠시 나갔다 다시 들어가고, 말 걸지 말라면 가만히 서 있었다. 붙잡고 울 땐 같이 울었다.
어느 가족인들 애틋하지 않은 가정이 있을까. 하나같이 구구절절하고 마음 아픈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건 듣는 자체도 힘들었지만, 그들에게 질문을 해야 했던 내 자신이 싫어 더 힘들었다. “우리 딸은 지 엄마보다 내가 한 김치찌개를 더 좋아했다”는 한 아버지의 얘기를 들으면 역시 딸 바보인 우리 아버지가 생각나 코끝이 찡해졌지만 한편으로는 이 사연을 어떻게 기사로 쓸 수 있을지 고민했다. 우는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한참을 같이 울다가도 마지막엔 “그런데 아이가 첫째인가요”라고 팩트(사실) 확인을 해야 했다. 그러고 나서 노트북 앞에 앉아 기사를 쓰면 부끄러움에 다시 눈물이 났다.
아직도 진도에는 실종된 가족을 기다리며 온 힘을 쥐어짜 버티는 가족들이 있다. 세월호 침몰로 드러난 대한민국의 자화상과 슬픔이 잊혀지지 않도록 취재하고 기록하는 게 기자의 역할임은 알고 있다. 다만 그 역할에만 사로잡혀 그분들의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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