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대 대선 직전인 1992년 9월 21일 김대중 민주당 총재를 방문한 김중권 당시 노태우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 김중권은 이 무렵 DJ에게 노태우 비자금 20억 원을 전달했다. 동아일보DB
○신실세 그룹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도하 신문에는 동교동계의 ‘가신’들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새로운 실세로 떠오른 면면을 소개한 해설기사들이 실렸다.
나는 당시 병보석으로 서울 강북삼성병원 1161호 병상에서 그 기사들을 읽었다.
새로운 실세로 보도된 사람들은 대선기간 중 기획회의를 이끌며 선거운동을 사실상 진두지휘하다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 임명된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당내 재정통으로 활약했던 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 미국통으로 경제참모 역할을 했던 유종근 전북지사, 김대중 당선자와 거의 매일 조찬을 함께했던 박지원 대변인과 정동영 대변인, 김한길 공보팀장, 설훈·김영환 비서실차장, 그리고 전격적으로 비서실장에 임명된 김중권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이었다.
이들 새로운 실세들 가운데 이종찬 부총재는 그 후 국가정보원 원장이 되었고, 김원길·박지원·김한길·김영환 의원은 뒤에 모두 장관에 발탁되었으므로 언론보도가 어지간히 맞은 셈이다.
그들은 나와도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정권을 맡게 된 김대중 당선자를 위해 모두 열심히 일해주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의 정무수석비서관이었던 김중권 씨가 비서실장에 전격 임명된 것은 충격이었다. 그는 비서실장에 임명된 뒤, “대통령 당선자는 ‘청와대 비서실이 정부 각 부처의 업무를 간섭하는 게 아니라 대통령에 대한 기획·홍보의 참모역할만 하도록 축소개편하는 방안을 중점 연구하라’는 지침을 내리셨다”고 기자들에게 밝혔다.
김대중 당선자가 청와대 비서실의 기능과 역할, 내각과 청와대 비서실의 관계 등 차기정부의 핵심과제 중 하나에 대한 개혁구상을 김중권 실장에게 맡겼음을 강력히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김대중 당선자는 아마도 노태우 정권하에서 정무수석을 지냈던 김중권 씨의 능력을 높이 사서 기용한 듯했다.
○병실 방문
하지만 병실로 찾아와 불만을 토로하는 당료들처럼 나도 그가 비서실장에 임명된 것은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의 인격이나 자질이나 어떤 개인적인 감정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니다.
경력이나 능력이 탁월할지는 몰라도 그는 본래 우리 민주화 세력과 대립하던 5공 세력이고, 그것도 민정당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비민주화 세력의 본산이던 민정당 출신이 과연 민주화 세력이 출범시킨 새 정권을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정체성의 문제와 우려가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나는 김대중 당선자가 왜 김중권 씨를 기용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행정능력을 높이 산 때문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었지만, 내가 알기로 김중권 씨는 본래 판사 출신으로 민정당 국회의원에 당선돼 법사위원장인가 하다가 노태우 정권 때 정무수석비서관을 지낸 인물로, 사실상 행정경험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자가 여러 가지 점을 충분히 고려하여 임명하였을 것이니 우리는 이에 승복하고 오히려 그를 도와줘야 한다고 당료들에게 말했다. 김중권 씨는 비서실장에 임명되고 난 직후 병원에 입원 중이던 나를 세 번이나 찾아왔다.
“이번에 뜻밖에 생각지도 않았던 비서실장으로 내정돼 감개가 무량합니다.”
그래서 나는 웃는 얼굴로 “축하합니다”고 말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없이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는 김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을 받은 사람은 과거에 우리와 어떤 인연이 있었든지 개의치 않아요. 누구든지 동지이고 식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김 대통령을 모시게 된 김 실장이나 오랫동안 모셔온 나나 똑같은 입장입니다. 앞으로 김 실장이 하는 일을 뒤에서 적극 돕겠습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제가 비서실장을 2년 할지, 3년 할지 모르지만 비서실장으로서의 공직이 제게는 마지막입니다. 저는 정치할 생각은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비서실장직을 그만두면 친구인 권영우 전 의원이 운영하는 세명대학 총장으로 갈 생각입니다.”
그는 내게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으나, 후에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때 나는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 비서실장 자리가 공직의 마지막이라는 말은 하지 마시오.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우리 대통령께서 알아서 하시는 겁니다. 대통령이 김 실장보고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라 하면 나가야지요. 우리가 대통령을 모실 때의 입장은 언제나 그 양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되, 만일 그 양반이 뭘 해야 한다고 할 때 우리는 서슴없이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전국 정당을 만들려면 김중권 실장 같은 사람이 고향인 경북 울진에 가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야지요. 그래야만 우리 당이 전국 정당이 됩니다. 나도 마찬가지로 경북 안동에 가서 출마할 수도 있어요.”
“잘 알겠습니다. 제 힘이 다하는 대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헤어졌다. ▼ “조 재판관, 술 끊고 감사원장 할 준비하시오” ▼ DJ의 두 비서실장, 권노갑과 조승형
권노갑 고문 스스로도 술회한 바 있지만, 세인들은 ‘권노갑’이라고 하면 먼저 ‘김대중 비서’라는 이미지를 머리에 떠올린다.
“마치 비서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듯해서 그런지, 나 자신도 비서라는 호칭에 애착이 간다. 내가 죽으면 다른 것은 다 놔두고 비석에 ‘김대중 선생 비서실장’이라고 새겨주면 영광이여.”
권노갑이 DJP연합은 받아들이면서도 유독 김중권 비서실장 발탁에 대해 ‘충격’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아마, ‘DJ 비서실장’이라는 자리에 그 나름의 애착이 있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권노갑이 김대중 정부의 첫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내심 기대한 사람은 조승형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1994∼1999년)이었다. 1992년 대선 때 김대중 후보의 비서실장이었던 조승형은 강직한 성품으로 유명했고, 동교동계도 어쩌지 못하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1984년 5월 YS의 상도동계와 DJ의 동교동계가 힘을 합쳐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출범시켰을 때, 조승형은 63인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한다. 당시 미국 망명 중이던 DJ를 대신해 민추협공동의장을 맡고 있던 김상현 대행은 조승형에게 이듬해 2·12 총선(12대) 목포 출마를 권유했다. 조승형은 목포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권노갑의 목포 북교국민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승형은 “나는 정치에 맞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DJ의 ‘명령’으로 1988년 13대 국회 때 전국구 의원을 하긴 했지만, 조승형은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92년 12월 18일 대선이 끝나고 DJ가 정계은퇴를 선언하자 다음 날 탈당계를 내고 당을 떠났다. DJ는 이후 정계에 복귀했지만 그는 뜻을 번복하지 않았다. 조승형은 그런 성품의 소유자였다.
조승형은 비서실장 외에도 안기부장, 법무부 장관, 감사원장 후보로 끊임없이 하마평에 올랐다. DJ 정부 2년차인 1999년, 한승헌 감사원장이 정년퇴임하자 권노갑은 조승형을 후임으로 천거했다. 권노갑의 기억. “대통령의 내락까지 받고 조 재판관에게 술부터 끊고 준비하라고 얘기했다. 다른 건 다 좋은데 술을 좀 많이 마시는 게 흠이었다. 실제로 한 3개월인가 술을 끊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감사원장 자리는 김중권 실장의 고려대 선배인 이종남 전 법무부 장관에게 돌아갔다. DJ나 동교동계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5, 6공 인사였다. 권노갑은 또 한번 경악했다. 알아보니 김중권이 이종남을 추천하면서 “감사원장은 회계에도 밝아야 하는데 이종남 전 장관은 공인회계사이기도 하다”고 설득했다는 것이다. 권노갑은 “그럼 전임 한승헌 원장은 회계를 알았느냐?”고 반박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중권은 신(新) 실세였다.
DJ가 조승형이라는 인물 자체를 부담스러워했는지도 모른다. 조승형은 DJ의 장남 김홍일이 1996년 15대 총선에 출마하려 하자 “아버지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는데 아들이 국회의원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다. DJ 부자는 그의 말을 물리쳤고, 김홍일은 배지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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