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한 1998년, 나는 8·15 특사로 풀려나 일본으로 망명 아닌 망명을 떠났다. 당시 내가 한보사건으로 수감되었던 것이 억울한 일이었음은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 김 총재는 당내 율사 수십 명을 불러 이렇게 말씀했다.
“권 의원이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 포괄적 뇌물죄라는 것은 전두환, 노태우 대통령에게만 적용되었던 죄목인데, 이 법이 국회의원에게 적용된 것은 권 의원이 처음이다. 그러니 어떻게든 권 의원을 구해보시오.”
그리고 김 총재는 평창동에 있는 내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어떻게든 명예회복을 시켜주겠다”고 약속했고, 이에 집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그러나 막상 사면복권이 되자 나는 대통령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하여 일본행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김중권 실장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출국 전날 김대중 대통령은 나를 면대한 자리에서 “일본에 가거든 열심히 공부하게. 국제관계나 동북아정세, 그리고 통일문제 등을 공부하게나”라고 말씀했다.
그래서 일본에 건너간 뒤 게이오대의 한국 문제 전문가로 유명한 오코노기 마사오(小此木政夫) 교수의 조언과 도움을 얻으며 대학 연구원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한화갑의 건의
그런데 그해 말쯤, 한화갑 원내총무가 청와대에 들어가서 나의 귀국 문제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저 혼자 일할 순 없으니 노갑이 형과 함께 일할 수 있도록 귀국을 허락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한화갑 총무가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나의 귀국문제를 건의했고, 그러자 대통령은 “조용히 들어오라고 하게”라며 허락했다는 것이다.
한화갑 총무는 이 같은 사실을 제3자를 통해 일본에 있던 나에게 알려왔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송년회 등으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을 것 같은 12월 31일을 택해 김포공항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김포공항엔 수많은 동지들이 마중 나와 있었다.
귀국 후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에 대한 귀국건의가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김중권 비서실장이 나를 견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당료들이나 국회의원들, 그리고 나와 가까웠던 기자들이 찾아와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는 그 말을 귀담아듣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출국 전 김중권 실장을 만났을 때의 좋은 인상을 그때까지 지니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런데 그 후 들려오는 이야기가 김중권 실장이 나에 대해 좋지 않은 보고를 대통령께 올린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정확히 모르지만 그 때문에 대통령이 많이 고민하신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풍문은 어디까지나 풍문이라 나는 반신반의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대통령이 제3자를 통해 문제의 보고가 사실인가를 직접 확인해 왔기 때문에 그 풍문이 사실무근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전언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대통령은 전언자의 보고를 듣고 나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사실 나는 김중권 씨가 비서실장으로 있는 2년 동안은 인사 같은 문제는 아예 기웃거리지도 못했다. 내가 그나마 총선 낙천자들과 당료들을 공기업체로 보내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비서실장이 김중권 씨에서 한광옥 의원으로 교체된 후였다.
○당 대표 김중권
김중권 씨는 16대 총선 때 경북 울진에서 출마하여 낙선했으나, 그해 7월 “동서화합의 다리가 되어 정권 재창출의 디딤돌이 되겠다”며 당내 최고위원 경선에 출마했다.
당시 최고위원 경선 불출마를 선언했던 나는 김중권 씨가 당선될 수 있도록 뒤에서 당료들을 설득했다. 민주당이 전국 정당이 되기 위해서는 김중권 씨 같은 영남 출신의 최고위원이 나오는 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중권 씨는 그해 최고위원에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 정동영 의원의 발언 파동으로 내가 임명직 최고위원을 물러난 직후에 민주당 대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국정을 다루는 비서실장은 몰라도 김중권 최고위원이 당 대표가 되는 것은 반대였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김중권 최고위원보다는 김원기 의원이 낫다고 추천했다.
내가 ‘김중권 대표’를 반대한 것은 정통성의 결여 때문이었다. 김원기 의원은 평민당 출신으로 정통성이 있지만, 김중권 최고위원은 민정당에 몸담았던 사람이었다.
대통령은 내 건의를 듣고 알았다고만 말씀하셨다. 하지만 그 후 한광옥 비서실장이 김중권 씨가 당 대표에 내정되었다는 통보를 해왔다. 나는 대통령이 결정한 이상 그를 돕기로 했다. 그러나 당에 뿌리가 없는 김중권 대표는 그 뒤 당 통솔문제로 상당히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진실인데, 2001년 5월 31일 김중권 대표와 가까웠던 추미애 의원은 의원 워크숍에서 그동안 김중권 대표가 당을 잘 이끌어 왔는데 내가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동지들을 위해 그해 3월 마포 사무실을 연 것이 힘을 빼는 계기가 되었다고 공격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국민의정부 초대 비서실장이 김중권 씨였다면 마지막 비서실장은 박지원 씨다.
▼ “늘 내 일을 방해한게 권노갑씨요” ▼ ‘동교동 兩甲’ 권노갑-한화갑의 애증
“동교동 동지들은 전부터 서로 ‘한번 동교동 맨이면 영원한 동교동 맨’이라는 농담을 하곤 한다. 그만큼 강한 유대감과 결속력을 갖고 있다. 오랜 세월 동안 김대중 총재를 모시고 동고동락하면서 생겨난 인간적 신뢰가 없었다면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가 총재에 대한 충성심을 낳았다. 세간에서는 이를 맹목적인 충성이라 비판도 하는 모양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한화갑 동지는 ‘옳은 것에의 복종’이며 ‘실증적 진실에 대한 복종’이라고 표현한 일이 있다.”(권노갑 고문의 1999년 회고록 ‘누군가의 버팀목이 되는 삶이 아름답다’ 중에서)
권노갑은 박정희 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할 때 수사관이 놓고 간 볼펜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차라리 저걸로 내 눈을 찔러버리면 잠시라도 고문을 멈춰주려나….’ 그런 세월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충성심만으로는 버텨낼 수 없다.
그건, 조지훈 시인이 외친 것처럼 오직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 눈물겨운 정성, 냉철한 확집(確執), 고귀한 투쟁일 수밖에 없다. 아니 그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세월이다.
하지만 동교동계도 사람이라, DJ가 세상을 떠난 뒤 많은 변화가 있었다.
권노갑과 함께 ‘동교동계의 양갑(兩甲)’으로 불린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75)의 변신이 대표적이다. 18대 대선을 앞두고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뒤, 한화갑은 신동아 기자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동교동계에서 ‘팽’당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이봐요. 세상을 제대로 알아야 해요. 정치인이 사람을 쓸 때는 필요해서 쓰는 것이지, 키워주려고 쓰는 게 아닙니다.”
―DJ가 그랬다는 말씀인가요?
“모든 지도자가 다 그래요. 그걸 알고 자기 자리를 잡아야 합니다. 나는 무조건 충성하려고 한 사람이었지만 말이오.”
한화갑은 그리고 권노갑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보다 여덟 살 많은데 나는 그의 상대가 못돼. 그는 내가 하려는 일을 늘 방해했어.”
사실이다. 한화갑은 1995년 지방선거 때 전남도지사에 출마하려 했다. 권노갑이 막았다. “총재가 나한테 도지사 나가라고 했지만 내가 그럴 수 없다고 했다. 총재가 대선을 준비 중인데 같은 (전남) 신안 출신인 자네가 도지사를 나간다는 게 말이 되는가?”
한화갑은 ‘포스트 DJ’를 꿈꿨다. 권노갑은 그것도 막았다. 신라호텔에서 한화갑의 ‘동교동 동기’인 김옥두 사무총장까지 ‘증인’으로 앉혀놓고 3가지 이유를 대며 안 된다고 말렸다. 병역미필이고, 고향이 신안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 동교동 비서 출신이 어떻게 대통령을 하겠다는 것이냐고 막았다. 대신 당 대표를 하라고 했다. 실제로 DJ의 승낙까지 받아 역시 김옥두가 있는 자리에서 통보했다.
DJ는 권노갑의 얘기를 듣고 난 다음 딱 한마디만 덧붙였다고 한다. “(한화갑은 안 된다고) 자네가 너무 나서지는 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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