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사업을 위탁받고 있는 업종별 협회들은 현행법상 공공기관에 포함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정부에 대한 ‘방패막이’로 활용하기 위해 퇴직 관료들을 영입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다.
업계를 대표하는 이 민간협회들의 회장은 보통 기업인이, 부회장 또는 상임이사는 고위 공무원 출신이 맡는다. 민간협회에 취업한 퇴직 관료들의 임기가 끝나면 공석이 된 자리를 후배 관료가 다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채운다.
이렇게 민간협회를 통해 전현직 관료들은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커넥션’을 유지한다. 전형적인 ‘관료 마피아’ 문화가 형성되는 것이다. 이 같은 관료 마피아는 민관(民官) 유착으로 이어져 안전규제 등 국가 시스템의 기초를 갉아먹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간협회 인사권 장악한 관료 마피아
관료 마피아의 ‘숨은 낙하산’이 가장 많은 곳은 국토교통부 산업통상자원부 금융위원회 등과 관련이 깊은 건설업 유관 단체, 제조업 관련 협회, 금융 관련 협회 등이다.
9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국토부에 등록된 협회 등 비영리 법인은 343개에 이른다. 이 중에서도 특히 국토부가 정부 업무를 위탁하고 있는 10여 개 기관이 국토부 출신 고위 퇴직관료들이 주로 ‘둥지’를 트는 곳이다.
전국 6897개 건설업체가 회원사로 가입해 있는 대한건설협회의 상근부회장은 국토부 실·국장급 퇴직 관료들이 자리를 이어받고 있다. 현 상근부회장은 올 3월 선임된 정내삼 전 국토해양부(현 국토부) 건설수자원정책실장이다. 정 부회장에 앞서 2010년 3월부터 올 2월까지 상근부회장을 지낸 박상규 전 부회장은 국토부 중앙토지수용위원회 상임위원 출신이고, 2008년 4월∼2009년 12월 재임한 유승화 전 부회장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차장을 지낸 국토부 출신 퇴직 관료다. 100조 원이 넘는 건설공사 보증을 담당하는 건설공제조합은 이사장과 전무이사 모두 국토부 출신들이 대를 이어 장악해 왔다.
산업부가 손에 쥐고 있는 민간단체 인사권의 범위는 타 부처를 압도한다. 산업, 자원 에너지 정책을 총괄하는 만큼 재계 단체들과 제조업의 업종별 협회, 에너지 관련 단체들이 모두 산업부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대표적으로 무역협회는 산업부 차관급을 지낸 퇴직 관료에게 상근부회장 자리를 내주고 있으며 대한상의는 암묵적으로 산업부에서 1급 공무원을 지낸 인사에게 3년의 임기를 두 번 보장해 총 6년 동안 상근부회장으로 일하도록 해 준다.
낙하산으로 내려갈 수 있는 민간단체가 많다 보니 산업부 출신들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10년 이상 관련된 직위를 유지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심윤수 전 산업부 무역조사실장은 2004년 공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철강협회 상근부회장(2004년), 철강재유통협의회 회장(2007년), 한국기계전기전자시험연구원 원장(2010년)에 이어 최근 한국인정지원센터까지 4차례에 걸쳐 민간단체와 국책연구기관의 고위 임원 자리를 차지했다.
관료 마피아의 원조 격인 ‘모피아(옛 재무부+마피아)’의 맥을 이은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는 각종 금융 관련 단체들의 수장 자리를 독식해 왔다. 은행들의 연합체인 전국은행연합회는 1984년 창립 이후 박병원 현 회장을 포함한 11명의 회장 중 8명이 관료 출신이다. 생명보험협회 손해보험협회 여신금융협회 등의 민간협회도 대부분 기재부나 금융위 출신이 회장직을 맡고 있다. 보건의료 분야에서도 한국제약협회 대한병원협회 등에 보건복지부 퇴직 공무원 상당수가 재취업해 있다.
민관 유착이 위탁사업 부실로 이어져
각 부처가 소관 단체들의 인사권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것은 관료사회와 민간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나타난 오래된 관행이다. 행정고시 합격 기수를 기준으로 끈끈한 선후배 관계를 맺고 엄격한 상명하복의 조직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관료사회에서는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용퇴(勇退)’하는 관료들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암묵적으로 이들의 재취업 자리를 보장해준다.
관료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 기업들도 ‘고위 관료 모시기’에 적극적이다. 한 민간협회 관계자는 “협회가 업계와 정부 부처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야 하는 만큼 내부에서는 ‘힘 있는 낙하산’이 오기를 바라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했다.
민간위탁 사업은 이런 정부 부처들과 민간협회들의 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다져주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부 부처들은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할 때 법 개정을 통해 이를 민간단체에 위탁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든다. 민간단체들은 정부에서 사업을 위탁받고 정부 예산도 받아낸다. 정부 사업을 위탁받은 민간단체들은 “정부와 긴밀한 협조가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퇴직 관료들에게 자리를 내준다.
해양수산부 출신 퇴직 관료들이 장악한 해운조합이 선박운항관리 사업을 위탁받고 정부로부터 9년간 99억 원의 보조금을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문제는 세월호 참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민간위탁 사업을 둘러싼 관료 마피아와 민간협회의 끈끈한 커넥션이 심각한 부실과 부패로 이어질 소지가 크다는 점이다. 실제로 환경부에서 유해화학물질 수입신고 업무를 위탁받은 한국화학물질관리협회는 2006년부터 유독물 불법수입 소지가 있는 업체 관련 자료를 관세청에서 받아 지방 환경청에 제공하면서 주소, 전화번호 등 일부 정보가 삭제된 자료를 건네다 지난달 감사원의 지적을 받았다. 환경부 관계자는 “이 같은 정보 누락 때문에 지방 환경청이 유독물 불법수입 업체를 제대로 적발하지 못한 적이 있다”며 “협회는 이런 자료의 오류 문제를 알면서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화학물질관리협회는 화학물질 취급 업체들이 만든 단체로 환경부 퇴직 관료들에게 상근부회장 자리를 내주고 있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는 “민간협회에는 퇴직 관료 취업 제한이 없는 알짜 자리가 많다”며 “자신이 재취업할 수 있는 직장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관리 감독하는 관료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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