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順命]권노갑 회고록<18>박지원의 변명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17일 03시 00분


어느날 DJ가 날 부르더니… “잠시 외국에 나가 있게”

올 3월 11일 동교동계의 ‘화요 현충원 참배’에 나온 박지원 의원(오른쪽). 전남도지사 선거 불출마 배경도 설명할 겸 참배 모임에 합류해 오랜만에 권노갑 고문(왼쪽)과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아일보DB
올 3월 11일 동교동계의 ‘화요 현충원 참배’에 나온 박지원 의원(오른쪽). 전남도지사 선거 불출마 배경도 설명할 겸 참배 모임에 합류해 오랜만에 권노갑 고문(왼쪽)과 화합하는 모습을 보였다. 동아일보DB
○사업가 출신

내가 박지원 씨를 처음 만난 것은 13대 국회의원이던 1989년이었다. 내가 만났을 무렵에는 뉴욕에서 꽤 성공한 사업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가 우리 캠프로 들어오게 된 것은 5공 때 ‘김형욱 회고록’을 집필해 유명해진 김경재 동지의 설득에 의한 것이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온 김경재 씨는 미국에 유학 갔다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을 만나 회고록을 대필한 이후 현지에서 한국 민주화운동을 지원해왔던 사람이다.

김경재 씨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있다가 김대중 선생이 미국에 망명한 뒤로는 신문사를 뉴욕으로 옮기고, 거기서 김대중 선생을 도우며 뉴욕 한인회장을 지낸 사업가 박지원 씨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나이가 엇비슷하여 둘은 곧 친구 사이로 발전했고, 김경재 씨의 소개로 박지원 씨는 그 무렵부터 김대중 선생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총애

그 후 김경재 씨는 김대중 선생이 사면복권 된 1987년에 귀국하여 그해 서울 강남갑 지구당 위원장을 맡게 되었고, 박지원 씨가 귀국한 것은 그보다 몇 년 뒤인 1990년경이었다.

그가 처음 동교동에 드나들며 원외 부대변인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는 김대중 총재의 신임이 그리 두터웠다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후 무슨 일을 맡기면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에 차츰 김대중 총재의 신임을 받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지원 씨는 사업가로 성공한 사람답게 머리가 영민하고 순발력이 뛰어나며 또한 대단히 부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말을 조리 있게 잘하며 인상이 밝은 점이 큰 장점이었다. 김대중 총재는 이런 타입의 인물을 선호한다.

차츰 신임이 두터워지면서 박지원 씨는 1992년 14대 총선 때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입성했고, 이후 발군의 솜씨로 상당히 오랫동안 당 대변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내 기억에 남는 명대변인은 두 사람인데, 홍사덕 의원과 박지원 의원이었다. 홍사덕 의원은 김대중 총재의 발언을 옮길 때 그 말을 자기 식으로 요약하여 옮기는 재능이 있었으나, 박지원 의원은 김대중 총재의 발언 내용을 정확히 메모해 이를 각색하지 않고 토씨까지 그대로 발표하는 특이한 재주가 있었다.

내가 대통령의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곁에 두었을 만큼 유능하고 부지런한 박지원 의원은 이후 장관으로,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김대중 대통령을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외유 요구

2001년 말부터 이른바 당내 개혁세력이 인적쇄신을 요구하면서 나의 외유를 요구하고 나왔을 때다. 어느 날 김대중 대통령은 나를 불러 잠시 외국에 나가 있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다.

주군을 위해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 장렬하게 죽을 수는 있어도 부정한 자로 몰려 죽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근거도 없이 내가 부정한 자로 몰려 희생을 당한다면 나중에는 주군도 그 책임을 면할 도리가 없게 된다. 더구나 그때 내 뇌리에는 아들과 딸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씀드렸다.

“저는 부정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습니다. 각종 게이트가 터질 때마다 제 이름이 오르내렸지만 단 한 건도 사실로 확인된 것이 없지 않습니까? 만일 단 한 건이라도 부정한 일이 드러나면 저는 외국에 나가겠습니다. 그러나 저도 자식을 둔 입장에서 부정한 아버지로 몰려 외유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나도 아네. 시끄러우니 그런 말을 한 것이지.”

이 일이 있은 후 언론에서는 내가 대통령에게 항명했다는 등의 추측 보도가 나갔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른 일이 없음을 대통령에게 해명한 것이고, 대통령도 그 해명을 듣고 내 입장을 이해해줬을 뿐이다.

그런데 2002년 4월 26일 저녁 제주도에 있는데, 느닷없이 내가 진승현 게이트에 연루되었다는 TV보도가 나왔다.

나는 곧 박지원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뉴스에 내가 돈을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는데, 나는 그런 일이 없네”하고 말했다. 내 말을 대통령에게 전해달라는 뜻이었다.

○검찰 소환

하지만 며칠 뒤 검찰이 나의 소환방침을 밝혔다.

대통령비서실장은 직책상 여러 정보를 접하는 자리다. 제주도에 있던 나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도 “어디 계십니까?”하고 안부만 물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박지원 실장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자네는 알고 있었나?”하고 물었다. 그러자 박 실장은 “예,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형님한테 말씀드리지 않은 것은 형님은 그런 일이 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결국 진승현 게이트는 무죄로 판결났다. 내가 무고하게 기소된 배경에 대해 그 후 진상을 알게 되었지만, 이미 끝난 사건이고, 내가 이제 와서 그 사실을 따로 밝힐 처지도 아니다. 다만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다르다는 점이다.

김중권 실장과 박지원 실장의 중간에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던 이로는 한광옥 실장이 있었다.  

▼ 권노갑 “박지원 지원유세는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2008년 총선 앞두고 걸려온 DJ의 전화… “목포 가서 좀 도와주소”  

김대중(DJ) 대통령의 ‘외유 권유’를 물리친 권노갑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정동영 그룹의 ‘정풍 운동’에 환멸을 느낀 DJ는 새천년민주당 총재직을 내놓을 생각까지 하고 있던 터였다.

DJ가 당시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을 맡고 있던 박지원을 보내 다시 한번 외유 의사를 타진하자 권노갑은 마음을 굳혔다. “대통령의 뜻이 정 그렇다면 나가겠다고 전해주게. 하지만 언론에 설명은 해야 하니까 박 수석이 성명서를 하나 만들어 갖다 주게.”

박지원은 곧 성명서를 만들었고, 권노갑은 기자회견을 준비했다. 그때 미국에 있던 아들의 전화가 걸려왔다.

아들=“외국 나가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권노갑=“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느냐?”

아들=“아버지가 (외국에) 나가면 모든 걸 뒤집어쓰고 ‘비리 정치인’이 되는 겁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되고, 아버지 손자들은 또 어떻게 됩니까? 저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권노갑은 고민했다. 장성해서 자식까지 둔 아들의 항변은, 절규에 가까웠다.

회한이 밀려왔다. 돌이켜보면 숨어 다니느라 부모 묘소까지 잃어버린 불효자였다. 수배 중인 탓에 신문의 강제이장 공고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불효자도 모자라 자식에게 ‘비리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낙인까지 물려줄 수는 없었다.

권노갑은 다시 박지원을 찾았다. “박 수석, 자네도 입장을 바꿔놓고 한번 생각해보소. 도저히 그렇게는 못 나가겠네. 대통령께 그렇게 말씀드려주소.”

DJ는 자서전에서 그때의 소회를 이렇게 남겼다. “아마도 답답하고 억울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는 생물이었다. 박 수석이 전한 그의 항변은 슬펐지만, 서운했다. 수십 년 동지와 이런 악재를 만나 서로의 의중을 물어본다는 게 얼마나 비루한가. 운명이란 이렇듯 잔인하기도 했다.”

‘입과 입술’같았던 박지원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처지도 달라졌다. 박지원은 DJ가 총재직을 사퇴할 때 정책기획수석에서 물러났지만, 얼마 뒤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완벽하게 DJ 정부의 2인자가 된다. 반면 권노갑은 ‘진승현 게이트’로 구속된 뒤 김대중 정부가 끝날 때까지 영어(囹圄)의 몸을 면치 못한다.

특히 ‘진승현 게이트’를 거치면서 박지원에 대한 권노갑의 감정은 서운함을 넘어 불신으로 치달았다. 현대 비자금 사건 이후의 사면복권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혔다.

18대 총선을 앞둔 2008년 초, 전남 무안으로 향하는 권노갑의 승용차 안. DJ의 차남인 김홍업 의원의 선거를 돕기 위해 내려가는 길이었다. 차 안에는 권노갑과 측근인 배석영(현 국민희망 서울포럼 국민화합위원장), 그리고 이훈평 전 의원이 함께 타고 있었다.

권노갑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DJ였다.

“무안 가는 김에 목포도 좀 다녀오소.” 김홍업 지원유세를 마친 다음 목포에 가서 박지원도 좀 도와주고 오라는 말이었다.

“무안은 가겠지만 목포는 도저히 못 가겠습니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
#박지원#권노갑#김경재#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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