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온유 양은 4남매 중 맏이였다. 아버지는 “첫째는 참고 양보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양 양은 피자를 먹을 때 부모 것부터 덜어놓고 남은 조각을 동생들에게 나눠준 뒤 자기 걸 집어 들었다. 그는 친구들이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을 오후 7시부터 11시까지 학교 앞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을 타면 동생들에게 간식을 사주곤 했다.
“난 왜 참아야 돼? 왜 난 만날 손해만 봐야 되냐고!” 양 양이 열다섯 살 때 이렇게 한 번 반항한 것으로 사춘기를 넘겼다고 아버지 양봉진 씨(48)는 전했다. 어머니는 “불만이 있으면 편지를 써서 바른 소리를 곧잘 하는 당찬 딸이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양 양의 별명은 ‘양반장’이었다. 지난해 1학년 대표에 이어 올해는 학급 반장을 맡았다. 단원고 2학년 A 양은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했던 친구가 있었는데 온유가 살갑게 대해준 덕분에 친구들도 사귀고 그렇게 싫어하던 사진도 같이 잘 찍게 됐다”고 말했다. 양 양은 원래 올해도 학년대표를 하고 싶었다. 어머니는 “온유가 ‘친한 친구가 학년대표를 하고 싶어 한다’고 고민하기에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더니 결국 포기했다”고 말했다.
양 양은 어릴 때부터 처음 듣는 소리도 건반으로 음을 짚어낼 정도로 음감이 좋은 편이었다. “레슨비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가르쳐보고 싶다”고 하는 피아노 선생님도 있었다. 마음을 다친 사람을 돌보는 음악심리치료사가 되는 게 양 양의 장래희망이었다. 수학여행 며칠 전 그는 아버지에게 사회복지 관련 경험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단원노인복지회관과 군자사회복지관 등에 “우리 딸을 자원봉사자로 써 달라”고 요청해놓은 상태였다.
아버지는 “온유가 일찍 하늘나라로 떠난 것보다 더 안타까운 게 있다”고 했다. “이 아이가 살았더라면 남을 위해 헌신하며 살았을 텐데 그 마음을 펼쳐보기도 전에 이렇게 차가워져서….”
안산=홍정수 기자 hong@donga.com ▼ 덩치 커도 살뜰히 남 챙긴 딸같은 아들 ▼
친구 구한 정차웅군
키 177cm, 몸무게 102kg인 거구의 아들을 아버지 정윤창 씨(47)는 ‘딸 같은 아들’이라고 불렀다. 정차웅 군은 웬만한 성인 남자보다 덩치가 컸다. 눈썹이 진하고 이목구비도 커서 처음 보면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이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다르게 검도장에 가면 관장님과 “오늘은 집에 있는 컴퓨터를 바꿨어요” “학교에서는 친구들이랑 ○○ 하고 놀았고요” 하면서 미주알고주알 자기 이야기를 했다.
검도장에서 초등학생 꼬마들에게 유독 인기가 많았다. 처음 들어와 낯설어하는 아이들에게 먼저 다가가 말을 걸고 돌봐 주는 자상한 ‘형아’였다. “남이 좋아하는 걸 해주려고 하기보다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게 진짜 배려하는 거라고 형이 가르쳐줬어요.”(석모 군·11)
수련회를 가면 저녁 때 삼겹살을 구워 아이들 접시에 하나하나 놓아주고 본인은 마지막에 남은 걸 집어 먹었다. 덩치에 비해 유난히 사근사근한 성격 때문에 한 번 봤던 학부모들도 정 군을 기억했다. 수학여행 가기 전엔 기념품 사가지고 돌아오겠다며 검도장 동생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지난달 23일 시신이 발견된 러시아 출신 학생 슬라바(본명 세르코프 빌라체슬라브·17) 군은 정 군의 단짝이었다.
정 군은 사고 당일(지난달 16일) 가장 처음 사망자로 확인됐다. 친구 둘을 구하고 나서 배 안에 남은 친구들을 찾으러 다시 들어갔다가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발견됐다. 친구를 구하다 희생된 정 군에게 가족들은 “국민 세금을 낭비할 수 없다”며 가장 싼 수의를 입혔다.
정 군을 10년 전부터 봐온 이양호 해동검도 관장은 정 군을 ‘된장 같은 아이’였다고 표현했다.
“검도장 아이들에게 시간이 갈수록 남을 더 배려하고 인내하는 ‘된장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요. 차웅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가 먼저 살려고 하지 않고 친구들을 끝까지 배려한 거잖아요. 된장 중의 된장, 진국 중의 진국인 거죠.”
안산=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엄마, 가스 잠갔어?” 확인하던 꼼꼼이 ▼
최초 신고 최덕하군
“엄마, 가스 불 제대로 잠갔어? 끄고 나온 것 맞지?” 최덕하 군은 초등학생 때 외출한 엄마에게 전화해 가스 불 점검을 하곤 했다. 가스 불 위에 올려놓은 냄비를 깜빡해 불이 날 뻔했던 기억을 최 군은 자주 떠올렸다. 어머니 김상희 씨(45)는 “어릴 때부터 어른보다 주변을 잘 챙겼다. 위기 상황이 닥치면 차분하게 자기가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하는 아이였다”고 말했다.
최 군은 시사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신문과 뉴스를 열심히 챙겨봤다. 가족들은 뉴스를 보다가 모르는 게 나오면 최 군에게 물었다. 한때 장래희망으로 아나운서를 꿈꾸기도 했다. 아버지 최성웅 씨(52)는 “주변 일에 관심이 많고 어딜 가면 자기 의견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 적극적인 아이였다”고 말했다. 최 군은 중학교 2학년 때 반장과 학년회장을 맡았다.
장래희망은 여러 번 바뀌었다. 검도를 시작한 중학생 무렵엔 경호원이 되겠다고 했다가, PC방에 드나들면서는 프로게이머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기 때 꿈은 ‘아파트 사장님’이었어요. 엄마 아빠한테 집 지어주겠다고….” 어머니는 최 군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최 군에게 검도를 가르쳤던 차이성 관장(31·여)은 “남자 관장님에게 ‘아버지, 배고파요. 맛있는 거 사주세요’ 하면서 곰살궂게 굴었다. 엉덩이를 툭 치면 ‘어허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라면서 생긋 웃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엄마 손이 필요하지 않고 뭐든 스스로 한 아이”라고 했다. 수학여행 짐도 혼자 쌌다. 집에서 나설 땐 “잘 다녀올게. 엄마 사랑해” 하며 꼭 껴안았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때 온기가 아직도 느껴진다. 그 온기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덕하가 최초 신고자라고 들었을 때 ‘전화하는 시간에 살아 나와 주지’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엄마 아빠한테 끝내 전화 한 통 못한 게 마음 아프지만 자랑스럽고 감사해요.”
안산=최고야 기자 best@donga.com ▼ 고교때 암투병 친구어머니 보살펴 ▼
민간 잠수사 이광욱씨
학창 시절 아들은 한강에서 시신을 건지는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수영과 잠수를 배운 아들은 나이가 들며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갔다.
민간 잠수사 이광욱 씨의 아버지 고 이진호 씨는 해군 특수전전단(UDT) 5기 출신이다. 아버지는 1974년 팔당댐 공사 때 잠수사 일을 하다 경기 남양주시 조안면에 눌러앉았다. 이 씨는 수해나 사고가 났을 때 아버지가 시신을 건져 올리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이 씨의 가족은 봉사하는 삶을 살기로 동네에서 유명했다. 이 씨의 아버지는 10년 동안 이장을 했고 어머니는 부녀회장을 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동생은 자율방범대원이다. 지명관 조안면 면장(54)은 “이 잠수사 부모님은 없는 형편에 사재 털어서 남들 돕고 그랬다. 아들도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이 씨는 남양주시 소년소녀가장 돕기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이 씨는 정도 많았다. 이 씨의 빈소를 찾은 친구 윤명규 씨(53)는 기자에게 ‘38년 전 자라사건’을 털어놨다. 당시 두 사람은 고교 1학년생이었다. “우리 어머니가 위암 수술 받은 걸 어떻게 알았는지 꼭두새벽부터 집에 찾아와 자라를 내밀더라고요.” 이 씨는 몇 달 동안 밤마다 강에서 자라와 붕어를 잡아 이튿날 아침 윤 씨 집을 찾았다. 키 180cm의 거구인 이 씨가 ‘오늘 몇 마리 못 잡았어’ 하며 머쓱해하던 표정을 윤 씨는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 씨는 세월호 실종자 구조를 위해 급하게 진도로 내려갔다. 어머니 장춘자 씨(71)는 “밥상 차려놨는데 어디를 빨리 가야 한다며 밥 한술 못 뜨고 나갔다”고 말했다. 둘째 아들 이모 군(18)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진도에 가신 걸 알았다”고 했다. 앳된 소년의 얼굴로 검은 상복을 입은 둘째 아들은 단원고 학생 희생자들과 동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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