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광옥 실장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아직 신도환(辛道煥) 의원의 비서를 하고 있을 때였다. 그러다가 그는 1981년 민한당으로 서울 관악구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1984년 김대중·김영삼 양 의장이 민추협을 구성한 뒤 그 대변인을 맡았다.
1988년 13대 총선 때는 평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서 다시 당선되었고, 그해 김대중 총재의 비서실장이 되었다.
한광옥 실장은 과묵하고 덕이 있으며 포용력이 있는 사람으로 나와는 단 한 번의 갈등이나 충돌도 없었던 인물이다.
1993년 3월 민주당 최고위원 경선 때 나는 4등, 노무현 후보가 5등, 그리고 한광옥 후보는 6등으로 당선됐다. 당시 최고위원은 당무위원을 2명씩 추천할 수가 있었는데, 한광옥 최고위원은 김인곤 의원 한 사람만 추천하고 나머지 한 사람의 몫은 나에게 그 권한을 넘겼다.
당초 내가 추천한 당무위원은 한화갑 박상천 의원이었는데, 한광옥 최고위원이 내게 넘긴 1명의 몫으로 나는 홍사덕 의원을 추천했다.
홍 의원은 당시 3선 의원이었는데도 당내에서 그를 아무도 추천해주지 않았다. 관계로 보아서는 그와 가깝고 당시 민주당을 이끌던 이기택 총재가 추천하는 것이 옳았으나 그는 어찌된 셈인지 홍사덕 의원을 추천하지 않았다.
한광옥 의원은 1998년 서울시장에 출마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론조사를 해보니 당시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 물망에 오르고 있던 최병렬 후보에게 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내가 그 사실을 지적하고 그를 설득해서 출마를 포기시켰다.
○노사정 대타협
한광옥 의원은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다음 해인 1998년 2월 노사정위원장으로서 외환위기에 빠졌던 한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 대타협을 이뤄내는 큰 공을 세웠다. 뚝심이 그 일을 성사시킨 것이었다. 그는 노총과 전경련 등 상대방이 몇 시간이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충분히 발언하도록 유도했다고 한다. 인내심을 가지고 토론을 경청하던 한광옥 위원장은 측근에게 지시하여 회의실 문을 잠그게 한 뒤 합의서를 한 장씩 나누어 주고 다음과 같은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외환위기로 국가경제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국입니다. 이 같은 비상시국에 여러분이 자기 입장만을 고집한다면 나라가 결딴나고 맙니다. 나라가 결딴나면 노(勞)도 없고 사(使)도 없으며 정(政)도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국민들은 나라를 살리겠다며 전국적으로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누어준 합의서에 서명해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자기만의 고집을 주장하시어 나라를 망친 죄인으로 남으시겠습니까?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노동계와 재계 대표들은 결국 합의서에 서명했다. 이것은 당시 외환위기에 처한 한국의 대외 신인도를 높이고 사회 불안을 해소한다는 측면에서 큰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보궐선거와 비서실장
한광옥 씨는 그 후 1999년 보궐선거에서 구로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그런데 당선되고 나서 얼마 후 김중권 비서실장과 김정길 정무수석이 물러날 예정이라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당시 후임 비서실장으로는 국민회의 한광옥 의원, 김종인 전 대통령경제수석,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이 마음 놓고 사심 없이 보좌를 받으려면 정치력과 포용력과 조정력이 있는 한광옥 의원을 비서실장에, 그리고 묵묵히 일 잘하는 남궁진 의원을 정무수석에 기용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을 잘 아는 사람이 보좌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문제는 당사자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한광옥 의원이나 남궁진 의원 모두 처음엔 내키지 않아 했다. 왜냐하면 국회의원 자리는 임기가 보장되지만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수석비서관은 임기가 보장되지 않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자신들을 뽑아준 유권자들에 대한 의리 문제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을 위해 수락해달라고 두 의원을 설득했고, 두 사람은 결국 내 의견을 받아들였다.
제2기 청와대 비서실을 이끌게 된 한광옥 비서실장은 다음 날 기자회견을 갖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정 수행이 차질 없이 이뤄지고 당과 행정부가 호흡을 같이하는 윤활유 역할을 할 것”이라면서 “국민 모두가 외교 경제 등의 괄목할 성과에 대해서는 공감하지만 내정에서는 대통령의 뜻과 국민들의 생각이 호흡의 불일치를 보이고 있다. 국민의 뜻을 굴절 없이 보고 및 건의해 국민과 같이 가는 대통령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광옥 실장은 그 후 2001년 9월까지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김중권 씨가 민주당 대표에서 물러난 그해 9월 민주당 대표로 임명되어 2002년 4월 3일까지 그 역할을 수행했다.
과묵하고 뚝심이 있으며 포용력이 있는 정치인, 그것이 한광옥 실장의 이미지다.
▼ 질문 원고 검열 거부한뒤, 국회서 “광주 진상조사를”… 겁 없는 초선의 폭탄발언 ▼
전두환 정권과 한광옥
1982년 10월 7일 오후 2시. 11대 국회 본회의 정치 분야 대정부 질문자로 정해진 민주한국당 한광옥 의원이 국회의사당 현관에 나타나자 안기부 요원이 다가왔다.
“조심하시오.”
11대 국회는 전두환 정권이 만든 ‘어용 국회’나 마찬가지였다. 야당 지도자들은 모두 ‘정치 피규제자’로 묶여 꼼짝을 못했고, 민한당 역시 여당인 민정당의 ‘2중대’라는 소리를 들었다. 안기부는 국회의원들의 대정부 질문 원고까지 사전 검열했다. 그런데 서른아홉 살 초선인 한광옥이 ‘겁도 없이’ 원고 제출을 거부하고 일주일 동안 잠적했다가 대정부 질문 시간이 다 돼서야 나타난 것이다. 한광옥은 동료 의원들에게도 원고를 사전 배포하지 않았다.
“첫째, 정치 보복을 중단하라.” “둘째, 김대중 선생을 석방하라.” “셋째, 광주 사태의 진상을 조사하라.”…
한광옥이 전두환 정권을 향해 7가지의 요구를 쏟아내는 동안 본회의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권노갑 고문은 “정말 충격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당시는 김대중 이름 석 자도 부를 수 없을 때였다. 내가 가까운 의원들에게 ‘국회에서 김대중 석방을 발언해 달라’고 부탁해도 모두 고개를 저으며 난처해하던 때였다.”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DJ도 한광옥의 ‘대정부 질문 사건’을 전해 들었다.
그 후 미국으로 쫓겨 갔다가 1985년 2·12 총선 직전 귀국한 DJ는 동교동으로 찾아온 한광옥을 따로 불렀다. “늦었지만 우리 가족과 함께 그때 일에 깊이 감사하오. 앞으로 동지가 되어 같이 일합시다.”
한광옥의 ‘두 번째 인생’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DJ 곁을 떠난 적이 없지만 위기도 없지 않았다. DJ 정부 첫해인 1998년 실시된 서울시장 선거 때가 그랬다. 권노갑은 회고록에서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사실 한광옥의 서울시장 도전은 DJ의 뜻이었다. 노사정 대타협 직후 DJ는 “한 동지는 이제 뭘 하고 싶소?”라고 물었다. DJ는 다시 “뭘 하면 좋을까?”라고 묻더니 서울시장 선거 출마를 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청와대로 부르더니 “여론조사가 좋지 않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했다.
한광옥은 2010년 출간한 자서전 ‘선택’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시장 출마를 처음 제안한 사람은 내가 아니고 대통령이었다. 그런 대통령과 나 사이에 갈등이 있게 하고 나를 경계하는 사람들이 대통령 가까이에 중용돼 있었다. 나쁜 사람들!”
서울시장 후보는 고건 전 국무총리로 결정됐다. DJ가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탈당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사흘 만에 다시 DJ를 만났다. DJ는 “마음고생이 많았다”고 위로하며 여러 가지 제안을 했지만 한광옥은 한마디 말만 남기고 나왔다. “출마를 포기하겠습니다.”
일단 당론이 결정되면 따른다, 그게 바로 한광옥 스타일이었다. DJ가 서거하고,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 다음에도 그는 여전히 ‘DJ 맨’이었다. 권노갑도 그런 한광옥을 여전히 ‘동교동 식구’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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