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당국 “몰래 ‘정도전’ 보면 엄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5월 28일 03시 00분


북한서… 홍콩서… 못말리는 한국드라마 열풍

드라마 ‘정도전’.
드라마 ‘정도전’.
북한 당국이 한국 역사드라마 ‘정도전’의 불법 유통을 철저히 차단하라는 지시를 지난달 전국 체제 보위기관들에 전달했다고 북한소식통이 27일 밝혔다. 북한의 한국 드라마 단속은 늘 벌어지는 일이지만 이번처럼 특정 드라마의 제목을 거론하며 통제와 처벌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것은 이례적이다.

이 소식통은 “북한 당국이 보위부와 보위사령부 등 체제 보위기관들에 정도전 단속 지시를 하달하면서 이 드라마가 역사를 매우 심하게 왜곡하고 있다는 이유를 제시했다고 들었다”고 전했다. 그는 “하지만 실제 단속 이유는 정도전이 북한에서 매우 금기시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을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드라마 정도전은 이성계와 함께 왕(王) 씨의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이(李) 씨 왕조를 건국한 조선시대 개국공신 정도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신하들이 왕을 몰아내는 과정을 담고 있어 ‘백두혈통론’을 내세우며 3대 세습을 정당화하는 김정은 체제에 매우 위협적일 수밖에 없다.

드라마 속 이성계 묘사가 북한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와 정면으로 어긋난다는 것도 통제의 배경인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이성계가 권력에 눈이 멀어 고구려 영토를 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날린 만고의 역적이라고 가르쳐왔다. 게다가 북한 역사교과서에선 정도전의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는다. 반면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북한소식통은 “이번처럼 제목을 거론하며 불법 시청자 엄벌 지시가 하달된 것은 2000년대 중반에 한 번 있었다. 중국의 50부작 드라마 ‘황제의 딸’이었다”고 말했다. 이 드라마에는 난봉꾼인 황제와 권력 및 사랑을 차지하려고 싸우는 왕후와 첩, 자식들의 음모와 배신 등 궁중암투가 상세하게 나온다. 북한 주민들은 당시 이 드라마를 몰래 보면서 “우리(김정일 집안)도 저런 일이 벌어지겠지”라는 말을 나눴던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역사물에서 왕 또는 왕가를 다루는 것을 금기시한다. 주민들이 사실상 왕조체제인 북한의 현실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임꺽정이나 홍길동처럼 지배계층의 수탈이나 출신성분에 항거하는 주인공을 내세운 영화를 만들었지만 1990년대 이후 간부들의 수탈에 대한 주민 불만이 고조되자 이런 소재도 금기시됐다.

결국 북한에서 역사물로 다룰 수 있는 소재는 2010년 제작된 드라마 ‘계월향’처럼 왜적에게 맞서 싸우는 내용뿐인 셈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도 외부 드라마를 몰래 보며 눈이 높아진 북한 주민의 외면으로 조기 종영됐다. 북한에서 드라마 방영이 가능한 전국채널은 조선중앙TV가 유일하다.

한편 최근에는 북한에 스마트패드, 노트텔, USB 등 다양한 영상 재생기기와 저장매체가 유통되면서 보위부가 단속에 애를 먹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부 영상물은 밀수꾼을 통해 북한에 유입되곤 한다. 최근에는 북한 상인들이 중국의 거래 상대에게 특정 드라마를 요구하거나 북한 인권단체들이 몰래 살포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북한#정도전#한국드라마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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