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대희 국무총리 후보자는 28일 오후 1시경 점심식사를 하고 집무실로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야당에서 사퇴하라는 얘기가 있다”는 기자들의 질문에 “임명동의안까지 냈는데 무슨 사퇴”라고 받아넘겼다. 인사청문회 준비에만 집중하겠다는 취지였다.
그러나 이날 오후부터 안 후보자는 측근들에게 “미치겠다”고 말하며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미 전날부터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민하던 안 후보자는 측근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오후 5시 기자회견을 자청해 사퇴를 발표했다. 넥타이를 매지 않았다. 여야는 물론이고 청와대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전격적인 사퇴였다.
○ 사퇴 이유=아들, 가족, 의뢰인
오후 5시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굳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선 안 후보자는 “저는 오늘 국무총리 후보직에서 사퇴합니다”라며 곧바로 돌직구를 던졌다. “국민 여러분께 약속한 기부는 성실히 이행하도록 하겠다”는 말도 했다. 11억 원 ‘사회 환원’ 약속을 지키겠다는 것.
그는 준비한 원고를 다 읽은 뒤 편한 말투로 기자들에게 “잘 계세요”라고 말한 뒤 기자회견장을 나섰다. 다른 질문에 일절 답하지 않던 안 후보자는 결정적인 사퇴 계기를 묻는 질문에만 “아들, 가족, 의뢰인 이렇게 하시죠”라고 답했다.
안 후보자가 사퇴 결심에까지 이르게 된 건 아들과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컸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가족들은 처음부터 총리직을 맡는 데 반대했다고 한다. 게다가 “변호사 기간 동안 번 11억 원을 환원하겠다”고 발표해 새 아파트로 이사 간 지 3개월 만에 다시 집을 팔아야 할 판이었다.
안 후보자가 특히 괴로워한 것은 아들과 관련된 의혹이었다. 병역 특혜 의혹에 이어 아들의 취직조차 아버지의 전관예우 덕분이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28일 일부 언론이 아들의 회사에 연락해 취재를 시작하자 “더 버티면 아들이 제대로 회사 생활하기 어려운 지경”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아들과 관련된 의혹이 모두 사실무근이라며 억울해했다고 한다.
이날 안 후보자에게 사건을 의뢰했던 한 중소기업인이 “야당 의원들이 자꾸 전화해 이것저것 물어봐서 무섭다. 세무조사 받는 것 아니냐”고 토로한 고충도 사퇴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과거 본인의 약속을 100% 이행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사퇴에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안 후보자는 평소 “늘 약자를 위해 일했고 부끄러운 사건은 수임한 적이 없다”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러나 언론에서 2006년 대법관 후보자 인사청문회 때 “퇴직 후 변호사 활동을 하더라도 구체적인 사건은 안 맡겠다”고 말한 발언이 소개되고, 본인이 실제 대법원 사건이나 형사사건을 몇 건이라도 맡은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문회장에 서서 자신의 행동을 모두 정당화하기에는 양심에 일말의 가책이 느껴지는 상황에서 더이상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 박 대통령 “안타깝다”
안 후보자는 공식 사퇴 기자회견 직전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퇴 의사를 밝혔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비서실장을 통해 사퇴 소식을 들은 박근혜 대통령이 안타까워하신 것 같다”고 전했다.
총리실 관계자에 따르면 안 후보자는 사퇴 의사를 밝히고 가족과 함께 바로 지방으로 내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한 관계자는 “회견 직전까지 사퇴에 대한 낌새도 차리지 못했다”며 “회견 직전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그동안 수고했다’고 인사하고 바로 떠났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당분간 가족과 함께 떠나가 계시겠다고만 하셨다”고 덧붙였다.
안 후보자가 살던 서울 중구 회현동 아파트 문 앞에는 이웃이 남기고 간 수박 한 덩어리와 편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웃의 한 50대 주부’라고 자신을 밝힌 이 편지에는 “많은 어려움 다 떨쳐내시리라 믿으며 강골총리가 되셔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달라”는 당부가 있었다.
○ 긴박했던 6일
안 후보자의 22일 총리 후보자 지명에서 사퇴까지는 불과 7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대개조’라는 과업을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국민 검사’ 별명을 가질 만큼 강단 있는 안 후보자가 적격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다음 날인 23일부터 대법관 퇴직 후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해 5개월 동안 16억여 원을 번 것은 전관예우라는 논란이 커져갔다. ‘법피아’ 출신 신임 총리가 ‘관피아’를 척결할 수 있겠냐는 지적도 거세졌다.
안 후보자는 26일 “변호사 활동으로 번 수익 11억 원 전액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승부수를 던졌지만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변호사 개업 이후 사회에 기부한 4억7000만 원 중 3억 원이 최근에 이뤄져 총리가 되기 위한 정치적 기부 아니냐는 비판까지 제기됐고 급기야 ‘총리가 11억 원짜리냐’는 신종 매관매직 논란이 불거지면서 여론은 더욱 악화됐다.
26, 27일 실시된 동아일보와 리서치앤리서치 여론조사에서도 안 후보자의 국무총리 후보자 지명에 대해선 그리 높지 않은 평가가 나왔다. 수도권 응답자 가운데 안 후보자 지명에 만족스럽다는 의견은 44.1%, 불만족스럽다는 의견은 41.2%로 비슷하게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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