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무총리 후보자였던 안대희 전 대법관과 2012년 8월 어느 날 점심을 함께했다. 대법관에서 물러난 뒤 미국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나기 전의 송별 모임이었다. 그는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의 삼고초려를 받고 있던 중이었다. 유학 계획이 유동적이라는 말만 하고 자세한 얘기는 피했다. 박 대통령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그는 새누리당의 영입 제의를 수락했다.
안 전 대법관은 이번에도 박 대통령의 총리 제의를 고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총리 제의가 돌고 돌아 안 전 대법관에게까지 갔다”고 전했다.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끈질긴 설득으로 결국 그는 총리 제의를 수락했다. 정치에 입문해 새누리당의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은 것도, 총리 후보자가 된 것도 자신의 의지보다는 박 대통령의 의중을 따른 셈이다.
‘안대희는 경상남도 함안군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위키백과에서 안대희 전 대법관을 소개하는 첫 줄이다. ‘정치인 안대희’라는 단어가 처음엔 낯설게 다가왔다. 그렇다. 그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장과 대법관을 지낸 법조인이자 정치에 입문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정치인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그래서 총리 후보자에 지명되고, 낙마한 것도 그의 운명이다.
그를 아끼는 한 법조인은 “누구보다 자기 관리를 잘 해온 사람인데 안타깝다”면서 “젊은 변호사를 한 명 데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얼마 안 있어 4명까지 늘었다는 말이 들려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고 말했다. 돈과 명예를 모두 갖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공인(公人)의 길을 걸을 가능성이 남아 있었는데 왜 그랬는지 의아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그동안 자신으로 인해 겪었던 가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돈을 벌기로 했다면 그 길로 쭉 갔어야 했다. 총리 후보 제의가 왔더라도 왜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했는지 그 자신도 가슴을 치며 통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김대중 정부 때 그는 검사장 승진에서 두 번이나 탈락했다. 당시 그는 “옷을 벗을 때가 됐다”며 후배들과 통음을 한 적도 있다. 검찰 선배인 이명재 송광수 전 검찰총장 등이 아끼는 후배인 그를 말렸다.
그 후 사법시험 동기인 노무현 대통령이 그를 중수부장으로 발탁했다. 대선자금 수사를 하면서 여야를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둘러 ‘국민검사’로 불렸다. 대선자금 수사 때 그와 고락을 함께한 수사팀은 지금도 모임을 갖고 있다. 그 모임 이름이 ‘우검회’다. ‘우직하게 검찰이 가자’는 뜻으로 그가 이름을 붙였다. 그가 검사 때의 항심(恒心)을 우직하게 지켰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그가 정치권에서 자신을 ‘슈퍼 관(官)피아’라고 지목하며 사퇴를 촉구하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운명은 눈앞에서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이라면 숙명은 뒤통수로 돌멩이가 날아오는 것이라고 한다. 눈앞에 돌멩이가 날아온다고 해서 피하기는 쉽지 않다. 6일 만에 전격 사퇴한 것을 두고 “안대희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러날 때를 알고 실천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 정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심 끝에 내놓은 카드였다. 그러나 자신의 몸에 맞지 않는 정치라는 옷을 훌훌 벗고 사인(私人)으로 돌아갔다. 그를 정치로 이끌고 총리 후보자로 발탁한 박 대통령도 곤혹스러운 상황을 맞고 있다. 번번이 인사 문제로 흠집이 나는 것에 대해 문제의 근원을 깊이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사퇴 과정에서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법조계의 불편한 진실도 다시 불거졌다. 관피아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와 함께 법조계의 전관예우를 ‘법피아’로 규정하는 목소리도 거세질 것 같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