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울한 표정을 짓던 이케르 카시야스(33·레알 마드리드·사진)가 기자의 질문을 듣더니 발걸음을 멈추었다. 웬만한 외국 기자들의 질문에는 답변을 하지 않고 지나치다가 한국인 기자의 질문에 가던 길을 멈춘 카시야스를 본 주위의 각국 취재진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몰려들었다. 스페인 축구대표팀의 수문장이자 주장은 손바닥을 입에 갖다대고 조금 망설이더니 말을 꺼냈다. “모두 제 잘못입니다. 나를 비난하세요.”
14일(한국 시간) 브라질 사우바도르의 폰치노바 경기장에서 열린 스페인과 네덜란드의 조별리그 B조 1차전.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두 팀 간 4년 만의 리턴매치는 일찍부터 관심을 모았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에 0-1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팽팽할 것 같았던 경기는 네덜란드의 압도적인 공격과 카시야스의 실수가 더해지며 네덜란드의 5-1 역전승으로 끝났다. 네덜란드 응원단은 경기 도중 기차놀이를 하며 응원에 흥을 더했다.
경기가 끝난 뒤 기자는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으로 갔다. 이곳은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의무적으로 거쳐야 하는 곳이다. 각국 취재진이 자신이 인터뷰하고 싶은 선수에게 질문을 할 수 있다. 한정된 공간 탓에 수백 명에 이르는 취재진 모두 믹스트존에 출입하지는 못한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믹스트존 출입증을 제한적으로 분배한다. 다행히 기자는 출입증을 발급받아 믹스트존에 입장할 수 있었다.
사비 알론소,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 등 스페인의 슈퍼스타 대부분은 고개를 숙인 채 인터뷰를 거절했다.
특히 카시야스는 죄인이라도 된 듯 취재진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카시야스는 1-3으로 뒤진 후반 27분 백패스를 미숙하게 처리해 실점을 자초했다. 카시야스는 대기록을 앞두고 있었다. 이 경기 전까지 월드컵 본선에서 433분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전반 44분 골을 내주며 그의 연속 무실점 기록은 477분에서 멈췄다. 이 경기만 무실점으로 막았다면 발테르 쳉가(이탈리아)가 1990년 이탈리아 대회에서 세운 이 부문 기록 517분을 깰 수 있었다. 자신의 대기록 수립에도 실패하고 팀의 패배도 자초한 카시야스는 이날 경기 뒤 라커룸에서 동료들에게 “내 실수 때문에 팀이 졌다.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반면 각각 두 골을 터뜨린 네덜란드 승리의 주역인 아르연 로번과 로빈 판페르시는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하다 빨리 버스를 타야 한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사라졌다. 바삐 가던 로번의 이름을 불러 질문을 했다. “두 골이나 터뜨릴 줄 알았나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로번이 웃으며 짧게 대답했다. “다음 경기가 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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