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만 대면 알 만한 한 금융회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 회사는 수익이 급격히 나빠짐에 따라 인력 구조조정을 하기로 결정했다. 희망퇴직자 모집 공고가 발표되자 노조는 전국의 직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인력 감축에 반대하는 결의를 다지기 위해서였다.
회의가 시작되자 한 30대 직원이 번쩍 손을 들고 발언권을 요청했다. “수년 치 기본급을 위로금으로 주는 이런 좋은 조건의 희망퇴직을 왜 간부급에게만 적용합니까. 연차가 낮다고 차별하는 겁니까.” 곳곳에서 “옳소”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노조 집행부가 정리에 나섰지만 어수선해진 분위기는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결국 “여러분의 고견을 더 듣겠다”는 어색한 마무리 발언으로 회의를 마쳐야 했다.
이날 있었던 일이 외부에 빠르게 알려지면서 금융권 안팎에서는 “그 회사, 갈 데까지 간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 회사 안에서 더이상 희망을 찾기 어렵다고 판단한 눈치 빠른 직원들이 사표를 던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난해부터 본격화된 금융권 구조조정이 은행 증권 보험 등의 전 업종으로 확산되고 있다. 외국계 은행들은 영업이 부진한 점포를 폐쇄하면서 수백 명의 직원을 내보냈다. 증권업계에서는 인력 구조조정이 뉴스거리조차 되지 않을 만큼 일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보험 쪽에서는 창업 희망자에게 휴직 기회를 주면서까지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금융계에서 일자리가 사라지는 이유는 단순하다. 돈벌이가 시원찮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는 마당에 실물경제를 뒷받침하는 금융권의 수익이 늘어날 리 없다. 경기침체에 따른 저금리 기조도 금융사에 치명타다. 금융회사들의 가장 큰 수입원인 이자 수익이 쪼그라들다 보니 수익구조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방안을 찾기 어렵다. 금융당국이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및 수표 발행 수수료를 100원 단위까지 규제하기 때문에 비(非)이자 수익도 시원치 않다.
금융당국도 뾰족한 대책이 없어 보인다. 신제윤 금융위원장은 연초 “금융권이 고용률 70% 달성에 적극 기여해 달라”고 당부했지만 구조조정의 대세를 막지 못했다. 사생결단의 심정으로 직원을 내보내는 회사와 시장의 냉엄한 현실 앞에서 당국의 엄포가 가진 힘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정부는 채용형 인턴제 도입, 경력 단절 여성 채용 등 다양한 아이디어를 동원해 주요 시중은행에서 수백 개의 일자리를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저금리로 신음하는 보험사에서 올 들어 사라진 일자리만 수천 개에 달한다. 주요 은행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미루고 취소한 상반기 채용까지 감안하면 없어진 일자리 규모는 가늠조차 하기 어렵다. 좋은 일자리는 시장에서 나와야 한다. 당국이 일자리를 지켜달라고 엄포만 늘어놓을 게 아니라 기업이 돈을 벌고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시장부터 조성해야 한다. 문제는 결국 일자리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