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발표 ‘세계의 여성 150인’에 뽑힌 이길여 가천대 총장
《2012년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발표한 ‘세계의 여성 150인’에 선정된 이길여 가천대 총장. ‘두려움 없는 여성들’이란 수식어를 달고 힐러리 클린턴, 아웅산 수지 등 세계적인 인물들과 함께 뽑혀 화제를 모았다. 우리나라 여의사 1세대인 그는 공익법인 가천길재단의 회장으로 의료와 교육, 문화, 언론, 봉사를 아우르는 활동을 펴고 있다. 남다른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쉼 없이 새 역사를 쓰고 있는 그를 만났다.》
“많이 변했죠? 사람들이 그래요. 두 달만 지나도 이곳엔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다고.”
기자가 최근 새롭게 변모한 가천대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이길여 총장이 환하게 웃으며 답한다. 그는 국내 최대 규모의 대학 통합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내 2012년 3월 가천대를 탄생시켰다. 가천대 글로벌 캠퍼스(구 경원대· 경기도 성남 소재)에는 이 총장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색다른 자랑거리가 적지 않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일명 ‘딱정벌레’라 불리는 교내 순환버스. 전기 충전으로 움직이는 에코 버스로 정문에서 출발해 강의실로, 도서관으로 학생들을 실어 나른다.
“제가 한번 강의실 건물로 걸어 다녀봤어요. 여학생들이 하이힐을 신고 멋도 내고 싶을 텐데, 학교에 오르막길이 많아 걷기 힘들겠다 싶었지요. 저는 ‘행복한 캠퍼스’를 만들고 싶어요. 그래서 학교가 자꾸 오고 싶은 곳,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 됐으면 하는 거죠.”
이 총장은 이런 생각으로 유럽 광장을 연상시키는 프리덤 광장을 만들고, 예술적인 ㄷ자형 대형 건물 비전 타워도 세웠다고 한다. 딱딱한 강의실, 단조로운 학교 건물의 이미지를 없앤 것.
가천대 지하철역에서 내리면 바로 학교 광장이 이어져 편리하던데요. 지하철에서 나오는 길에는 구름 하늘같은 천장도 볼 수 있고 분수도 있고요.
“공사 설계자와 함께 우리가 본뜰 수 있는 일본의 신도시에 갔었어요. 이런 구조가 처음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했는데, 눈으로 직접 보고는 해보겠다고 하더라고요. 또 지하철에서 내리면 학생들이 바로 하늘을 보게 하고 싶은데, 몇 분은 걸어 나와야 한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하늘을 만들라고 했지요(웃음). 제가 라스베이거스 갔을 때 호텔 천장이 실내인데도 하늘처럼 보인 것이 기억났거든요. 정말 재미있고 신바람 나는 곳을 만들어보자, 했던 것이죠.”
이 총장의 이런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사랑’이라고 말한다.
“부모가 사랑으로 세심하게 보살펴야 아이들이 잘 자라잖아요. 저는 늘 우리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까 생각해요. 학교에서 부모처럼 학생들을 자식같이 여기며 키우는 게 행복해요. 병원에서는 환자를 고칠 때 행복하고요.”
이 총장은 ‘행복’이라는 단어를 즐겨 사용한다. 학생들에게 바라는 것도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열심히 몰입하면서 ‘나는 행복해!’ 하면 좋겠어요.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열정을 가지고 간절한 마음으로 도전하고 또 도전한다면 길은 열리게 마련이니까요.”
깡촌 소녀가 의사의 꿈을 이루기까지
이 총장은 자전 에세이 ‘간절히 꿈꾸고 뜨겁게 도전해라’에서 자신의 지나온 인생 경험을 털어놓았다. 1932년 전라북도 옥구군 대야면 죽산리 출생. 당시 전깃불도 안 들어오는 이른바 ‘깡촌’에서 태어나 꿈을 이루기 위해 열정을 쏟아붓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의 삶이 잔잔한 에피소드 속에 담겨 있다. 그 시대에, 더구나 농촌에서 여자가 대학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는데 서울대 의대에 진학하셨습니다. 의사가 되겠다는 꿈은 어떻게 갖게 됐나요?
“열다섯 살 때 평소 건강했던 아버지가 몸살 기운이 있다며 앓으신지 닷새 만에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시신 앞에서 목 놓아 우시던 외삼촌이 “일본에서 병이 났으면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었을 텐데”라고 하셨던 말씀을 잊을 수 없었어요. 그때 아픈 사람을 고치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죠.” 의대에 진학해서 공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여자가 의대에서 공부하는 게 흉이 됐던 시절이었죠.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격려 덕분에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어려운 살림을 꾸리면서도 학비와 하숙비를 꼬박꼬박 보내주시며 힘든 내색 한번 안 하셨어요. 편지에 늘 ‘엄마 사는 재미는 너 공부하는 거 보는 거다’라고 써 보내주셨죠.
저는 방학이 돼 집에 내려갈 때 가방 안에 사람 뼈를 넣어가서 공부하곤 했어요. 한번은 제가 뼈를 갖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동네 어른들이 오셔서 “이게 웬 부정 탈 일이냐”고 하셨습니다. 그때도 어머니는 “의대생이 뼈를 늘 옆에 두고 공부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니냐”며 맞서 싸워주셨죠.”
이 총장은 서른두 살에 미국 유학길에 나섰다. 대학 졸업 후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는 중에 여기저기서 맞선자리가 들어왔지만 그는 “선 볼 시간에 환자 한 명 더 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선진 의료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뉴욕에 있는 병원에서 5년간 머물며 수련의 과정을 마쳤는데, 그때 의료기술은 물론이고 세상을 크고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키웠다고 말한다.
의사가 ‘가슴에 품는 청진기’
귀국해 1958년 인천에서 문 연 ‘이길여 산부인과’는 당시 보증금을 받지 않는 병원으로 유명했다지요.
“어느 날 병세가 깊은 환자가 진찰을 받은 후에 다시 옷을 입고 돌아가려는 겁니다.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데 왜 그러냐’고 하니 ‘보증금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보증금 없어도 수술하고 치료해주겠다’고 하니까 ‘정말이냐’고 거듭 묻더군요. 의료보험이 없던 당시 돈을 못내는 환자들이 많아 치료비 떼이는 것을 방지하려고 병원에서 선불 형식으로 보증금을 받는 것이 관행이었어요. 저는 돈 없는 사람들도 치료 받고 수술 받고 입원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러면 병원 운영이 힘들지 않았나요.
“아니에요. 우리 병원이 보증금 없는 병원으로 알려지면서 가난한 환자들이 몰려들었지만 병원은 망하지 않았고 갈수록 흑자가 늘었습니다. 치료비를 내지 않았던 환자들은 그 보답으로 병원에 대해 좋은 소문을 내줬고, 형편이 되면 일부라도 꼭 갚으려고 애썼어요. 병원비를 내지 못한 분들이 쌀이나 감자, 옥수수 같은 농작물을 가져와 병원 마당이 시장 같을 때도 있었어요.”
그는 의사로 명성이 높아지면서 외출은 꿈도 꾸지 못했고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고 한다. 병원 밖까지 길게 줄을 선 환자들을 두고 식사도 할 수 없어 하루 한 끼만 먹으며 진료를 한 적도 있다고.
“미국에서 사온 핑크빛 잠옷이 있었는데, 한번도 입어보지 못했어요. 잠옷을 갖춰 입고 침대에서 제대로 잘 수 있는 기회가 없었던 거죠. 사온 지 10년쯤 지나니 살이 쪄서 어깨 쪽이 끼는 바람에 아예 입을 수 없게 됐어요. 그래도 지금까지 장롱에 넣어두고 있습니다(웃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지만 순간순간이 행복했어요. 이제 안 아프다는 소리를 매일같이 환자들에게 듣고 살았으니 신나고 즐거웠죠.”
후배 의사들에게 “가슴으로 치료하는 의사가 되라”는 당부를 하고 의대 졸업생들에게 ‘가슴에 품는 청진기’를 선물하신다고 들었는데요.
“병원에 들어서면 환자들은 긴장하게 마련이에요. 저는 환자들의 불안한 마음을 풀어주는 것이 의사의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위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는 참된 의료인이라고 할 수 없어요. 난방이 잘 안되던 시절, 제가 진료할 때 청진기가 차가워서 환자가 움찔 놀라는 걸 보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내 품 안에 넣어두었다 사용했더니 환자들의 반응이 한결 좋아졌어요.
저는 후배 의사들에게 ‘환자를 가슴으로 대하고 있나요?’라는 질문을 자주 던져요. 자신의 가슴에 따뜻한 청진기를 하나씩 품으라고 의대 졸업식에서는 청진기를 하나씩 선물하고 있습니다.”
미 포브스 발표 ‘아시아 기부 영웅’에 뽑히기도
마흔셋 나이에 일본 유학을 떠나 2년 만에 박사학위를 따셨는데요. 이때 중요한 결심을 하셨다고요.
“일본 유학 시절 제 인생에 전환점이 될 세 가지 중요한 결심을 했습니다. 첫째 종합병원을 만들어서 산부인과 환자뿐 아니라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하겠다, 둘째 의료 취약지에 병원을 세워야겠다, 셋째 좋은 의사를 많이 기르기 위해 교육에 힘쓰겠다는 것이었죠.”
78년 사재를 털어 의료법인 길병원을 만들고 종합병원을 설립하셨는데, 그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됐나요.
“1978년 150병상 규모의 ‘의료법인 인천 길병원’을 문 열었죠. 주변에서는 갑자기 병원을 크게 지었다가 적자가 나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했지만 개원 3년 만에 두 배로 시설을 확장했어요. 의료 취약지 병원은 1982년 경기 양평군에 양평 길병원을 세웠고, 1988년 철원에도 길병원을 세웠죠. 교육은 1997년 가천의과대학을 세워서 시작했고 경영난을 겪고 있던 경원대를 인수해 운영하다 오늘날 가천대로 통합한 것입니다.”
이 총장은 현재 공익법인 가천길재단의 회장으로 의료와 교육 문화 언론 봉사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가천 길재단의 이념은 ‘박애, 봉사, 애국’이다. 전국 무의촌을 대상으로 40여 년간 무료 진료를 해온 그는 개도국 심장병 어린이 수술 등 봉사활동도 많이 하고 있다. 사재를 포함해 1600억여 원을 들여 뇌과학연구소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을 설립하는 등 기초 의·과학 발전에도 힘쓰고 있다.
2013년에는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발표한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기부 영웅 48인’에도 선정됐다.
가천길재단의 상징인 바람개비는 무슨 뜻인가요.
“어린 시절 수수깡으로 만든 바람개비를 갖고 많이 놀았어요. 누가 잘 돌리나 경쟁하는데 제가 늘 이기곤 했죠. 빠른 속도로 달리면 빨리 돌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달리면 더 잘 돈다는 걸 알았거든요. 바람개비는 가만히 있으면 돌지 않아요. 바람이 불지 않으면 사람이 뛰어다니며 바람을 일으켜야 돌아갑니다. 바람 부는 대로 바람에 실려 사는 게 아니라, 바람을 만들고 바람에 부딪히며 헤쳐 나가는 것, 그것이 제가 살아온 삶입니다. 시련이 닥칠 때면 항상 ‘바람개비는 거센 바람이 불면 더 힘차게 돌아간다’는 것을 떠올렸어요.”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길이 끝나는 곳에서도/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스스로 봄길이 되어/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 정호승의 시 ‘봄길’ 중에서
이 총장은 자신이 애송하는 이 시를 학생들에게 자주 들려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속으로 주문을 외우듯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절대적인 절망은 없다. 희망을 가져라. 여러분이 남들의 길이 되는 사람이 돼라.”
▼이길여 총장의 가천대 발전 & 글로벌 인재 육성 전략▼
2012년 3월 가천의과대와 경원대, 두 대학을 통합해 만든 가천대는 재학생 수가 2만여 명으로 학생 수 기준 수도권 3위 대학으로 커졌다. 이길여 총장은 “2015년까지 국내 20대 사학, 2020년까지 10대 사학에 진입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면서 “이를 토대로 글로벌 명문대학으로 발돋움할 계획”이라고 밝힌다.
가천대 발전 전략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특성화’와 ‘글로벌화’ ‘연구역량 강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대학의 ‘글로벌화’는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입니다. 또 세계 대학들과의 무한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우리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학문 분야로 ‘특성화’를 이루어야 해요. 가천대는 두 개의 캠퍼스가 있는데, 글로벌 캠퍼스(경기 성남)는 IT 및 바이오나노, 의료관광 등 첨단 분야로, 메디컬 캠퍼스(인천 소재)는 의· 과학 및 의료보건 분야로 특성화하고 있습니다. 유능한 교수를 대거 초빙해 교육과 연구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기도 하지요.” 가천하와이교육원 등 가천대의 영어교육이 화제를 모으고 있는데요.
“가천하와이교육원은 미국 하와이 주에 있는 가천대의 기숙형 어학 연수원입니다. 가천대 학생들은 이곳에서 어학연수와 현지문화체험을 하고 있어요. 하와이 최고 명문대학인 하와이 주립대학에서 정규 학점도 취득할 수 있고요. 국내에서는 강화교육원에서원어민 교수를 초빙해 영어몰입캠프를 진행하고 있고,학교에도 다양한 영어학습공간인 글로벌 존을 만들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대, 미국 뉴욕주립대, 일본 메지로대 등 해외 유수의 대학에 교환학생을 파견하는 등 다양한 국제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합니다.”
미래에는 어떤 인재가 필요할까요.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기 위해서는 영어구사 능력이 필수예요.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나눔과 협력을 실천하는 인재지요. 미래사회는 창의적 사고로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과 협력해서 조직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인재가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창의적 사고능력,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키우고 봉사활동에도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 이길여 총장은…
1932년 전북 옥구 출생. 서울대 의대 졸업 후 미국 메리 이머큘리트 병원(Mary Immaculate Hospital)과 퀸스 종합병원(Queen's Hospital Center)에서 수련의 과정을 마쳤다.
일본 니혼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8년 ‘이길여 산부인과’를 문 열었고 1978년 국내 여의사로는 처음으로 의료법인을 설립했다.
의료 취약지인 경기도 양평, 강원도 철원 등지에서 적자를 감수하며 길병원을 운영,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1998년 가천의과학대학을 설립했으며, 경원대학교를 인수했다. 2012년 두 대학을 통합해 학생 수 기준으로 수도권 사립 3위 규모인 ‘가천대학교’를 출범시켰다.
사재를 포함해 1600억여 원을 들여 뇌과학연구소와 이길여 암·당뇨연구원을 설립하는 등 기초 의·과학 발전에도 힘써 2009년 정부에서 과학기술훈장을 받았다.
현재 길병원, 가천대, 가천문화재단, 새생명찾아주기운동본부, 가천미추홀봉사단, 경인일보에 이르기까지 의료 교육 문화 봉사 언론을 아우르는 공익법인인 ‘가천길재단’을 이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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