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권과 관가에서 농담처럼 나돌던 ‘정홍원 국무총리 유임설’이 26일 현실이 됐다. 이를 두고 천호선 정의당 대표는 “희극적 비극”이라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도 이런 비판을 감수하면서 정 총리 유임이란 고육책을 선택한 것은 당장의 부정적 여론보다 국정 공백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결국 경제 활성화 등 정책성과를 통해 최종적으로 평가를 받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다. 정치인 총리가 부상한 가운데 정 총리를 유임시킨 것은 ‘2인자의 자기 정치’에 대한 박 대통령의 거부감이 여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국회 인사청문회에 대한 공포감도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사의를 수용했다가 반려한 사상 초유의 인선에는 박 대통령의 다양한 구상과 고민이 담겨 있다. 》 [1] 인사 서둘러 매듭짓고 정책으로 승부
박 대통령은 문창극 전 총리 후보자가 자진사퇴한 지 이틀 만에 정 총리의 유임을 발표했다. 새 총리 인선 작업을 사실상 진행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당장 마땅한 후보도 없는 데다 국정 공백 상태를 더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유일한 관심사는 국정 공백 최소화”라는 청와대 핵심 관계자의 말과도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박 대통령은 24일 국회로 장관 후보자들의 인사청문요청서를 보냈다. 국회는 요청서를 접수한 날부터 20일 이내에 인사청문회를 열어야 하기 때문에 2기 내각은 7월 중순 출범할 수 있다. 하지만 총리 후보자를 새로 지명하면 정식 임명까지 한 달 넘게 걸려 2기 내각 출범이 또 미뤄진다. 박 대통령이 비판 여론을 무릅쓰고 정 총리 유임 카드를 꺼낸 이유다.
이번 인선은 총리 후보자들의 잇단 낙마와 맞물려 일시적으로 박 대통령의 지지율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국민이 체감하는 정책성과를 올리면 얼마든지 인사 실패를 만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대통령이 한동안 민생경기 회복에 다걸기(올인)를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2] ‘권력분점 구상’ 접고 다시 전면에?
박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이후 ‘권력 분점’을 시사했다. 국가 대개조에 앞서 박 대통령부터 변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만기친람(萬機親覽)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해 국정 ‘4륜(輪) 구동 체제’ 구상을 밝히기도 했다.
총리는 법질서 확립과 공직사회 개혁, 사회 안전 강화, 비정상의 정상화 등 국정과제를 전담하고 경제부총리는 경제정책을 총괄 조정한다는 것이다. 또 사회부총리를 신설해 비(非)경제 분야의 정책을 책임지도록 했다. 외교안보 분야의 컨트롤타워는 대통령국가안보실장이다.
이를 위해 경제부총리와 사회부총리, 국가안보실장을 모두 교체했다. 하지만 핵심 축인 총리를 유임시키면서 ‘권력 4분점 구상’도 접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또 비판 여론을 감수하면서 총리를 유임시킨 만큼 국정의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라도 박 대통령이 직접 나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3] 정치인 발탁땐 2인자 부상 거부감
문 전 후보자가 낙마하자 ‘정치인 총리론’이 급부상했다. 여론 검증의 높은 벽을 넘기 위해서는 선거와 공직을 거치며 국민의 검증을 받은 정치인이 유일한 대안이라는 지적이 많았다. 국가 대개조를 위해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데도 정치인은 비교 우위에 있었다. 상대적으로 결점이 적은 법조인이나 관료 출신을 발탁할 수 없는 분위기도 정치인 총리론에 힘을 실어줬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결국 정치인 총리를 발탁하지 않았다.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둔 ‘잠룡’이라면 정치적 미래를 위해 자기 목소리를 높일 우려가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청와대 내에서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충돌한 이회창 전 총리 사례를 들어 정치인 발탁에 부정적 기류가 강했다.
‘2인자’에 대한 박 대통령의 거부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기존 총리는 ‘대독(代讀) 총리’로 불릴 정도로 실권이 없지만 정치인이라면 위상이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 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이해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헌정사상 유일한 ‘책임총리’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여권에서는 차기 대선을 위해서라도 정치인을 발탁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야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선 후보군이 적은 만큼 총리나 장관 발탁을 통해 차기 주자들의 몸집을 키워줘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박 대통령은 ‘리스크가 있는 미래’보다는 ‘이득이 적은 현재’를 선택한 셈이다. [4] 여론몰이 인사청문회 제도 불신
윤두현 대통령홍보수석비서관은 정 총리의 유임을 발표하면서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노출된 여러 문제로 인해 국정 공백과 국론 분열이 매우 큰 상황”이라고 했다. 인사 참극의 원인이 청와대의 검증 실패나 국민과의 괴리감이 아닌 청문회 제도에 있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두 전 총리 후보자의 잇단 낙마에 대해 아무런 사과를 하지 않은 것도 이런 인식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청문회에 대한 박 대통령의 두려움은 정 총리 유임의 직접적 원인으로 꼽힌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총리 후보자 3명이 청문회장에 들어가기도 전에 낙마했다. 장관 후보자 가운데도 정부 출범 초기 김병관(국방부), 한만수(공정거래위원회), 김종훈 후보자(미래창조과학부) 등이 중도 하차해 내각 구성에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이 때문에 현재 인사청문회를 앞둔 장관 후보자 8명 가운데 여론에 밀려 낙마하는 경우가 나온다면 현 장관을 그대로 유임시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5] 與野와 협의하자니 정보유출 우려
박 대통령은 정 총리 유임 카드를 꺼내면서 여당과도 상의하지 않았다. 두 전 총리 후보자가 낙마한 만큼 이번에는 야권과도 물밑 접촉을 하지 않겠느냐는 전망까지 나왔지만 보안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의 인선 스타일은 여전했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인사 자체가 상당히 민감한 사안인 만큼 사전에 정보가 새면 오히려 어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13일 내각 개편 발표 당시 정치권 인사를 상당수 포함시키면서 개각 정보가 사전에 새어나가 청와대가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인사 보안이 이뤄지지 않으면 특정인을 견제하기 위한 근거 없는 마타도어가 난무하기도 한다. 하지만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인사를 위해서는 정치권의 의견을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