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다양한 현대사회엔 합의 추구하는 민주적 리더십이 효율적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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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거일의 생각]<1>지도력의 본질


우리 사회의 건강에 대한 걱정이 가득한 지금, 시민들은 각 분야의 지도자들이 지도력을 발휘해 주기를 기대한다. 특히 국정을 맡은 대통령의 지도력에 기대가 크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점을 잘 인식해서 ‘국가 개조’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대통령이 발휘해야 할 지도력은 어떤 모습인가? 이것은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다.

지도력이 무엇인지 누구나 안다. 그래도 그것을 정의하기는 무척 어렵고 설명하기는 더욱 어렵다. 지도력이 있으면 다른 결점들은 다 덮이지만, 그것이 없으면 다른 장점들도 별 소용이 없다. 그 점에서 지도력은 매력과 같다.

원래 지도력은 종교에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많은 종교들이 예언자의 풍모를 지닌 인물을 중심으로 자라났다. 자라투스트라, 석가, 예수, 마호메트, 루터, 츠빙글리, 칼뱅, 존 웨슬리, 최제우(동학)는 그런 예언자적 인물들을 대표한다. 엄청나게 크고 복잡해진 현대 사회에선 행정부를 관장하는 ‘행정적 지도자(executive leader)’들이 가장 중요해졌고 기업 활동을 주도하는 ‘경영적 지도자’들이 버금간다.

지도력은 ‘어떤 집단에서 한 개인이 그 집단의 목표들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되도록 다른 구성원들에게 미친 영향’을 뜻한다. 따라서 지도력의 크기는 두 가지 척도로 잰다. 하나는 지도자가 구성원들에게 미친 영향의 크기다. 다른 하나는 그가 이끈 집단이 이룬 성과다.

우리 시민들도 대체로 이렇게 지도력을 측정하는 데 동의하는 듯하다. ‘우리도 잘살아 보세’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사회적 역량을 집중해서 발전된 사회를 이루는 데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을 다수의 시민들이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 꼽는다.

지도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는 힘들다. 물건이 아니므로, 사람은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이내 자율적으로 반응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는 길은 그들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도록 돕는 길뿐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한도까지 따른다. 자연히, 지도자는 자신의 추종자들의 욕구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수준에서 사람들의 욕구는 사회적 목표의 달성과 사회의 안정적 유지다. 따라서 지도자는 목표를 뚜렷이 내걸고 그것을 이루는 길을 보여주어야 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안 사회가 안정되도록 해야 한다.

이 조건은 지도자와 추종자들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규정한다. 추종자들은 자신들이 고른 지도자를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지도자를 조종한다. 가장 열성적인 추종자들은 추종 집단을 이끌고, 때로는 그들이 지도자를 이끈다. 만일 지도자가 추종자들의 뜻에서 너무 벗어나면 그들은 지도자를 제재한다. ‘모든 지도자들은 또한 이끌린다. 수많은 경우에서 주인은 그의 노예들의 노예다’라는 독일 학자 게오르크 지멜의 얘기는 바로 이 점을 가리킨 것이다.

다양성이 극대화된 현대 민주 국가에서 이런 사정은 정치 지도자의 책무를 이주 어렵게 만든다. 지도자는 흔히 서로 적대적이고 조화가 어려운 욕구들과 주장들을 조정해야 한다. 이런 일에선 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권위적 지도자보다는 합의 정치를 추구하는 민주적 지도자가 대체로 효율적이다.

그러나 정치 지도자들은 대부분 권위적 지도자들이고 민주적 지도자는 생각보다 드물다. 그런 사정을 깔끔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두드러진 요인들 가운에 하나는 선거를 통해서 대통령이나 총리 같은 최고 지도자가 되는 과정의 격렬함이다.

최고 지도자가 되려면 누구든 먼저 자기 정당에서 적수들을 눌러야 하고, 이어 선거에서 다른 정당 후보들을 눌러야 한다. 이런 과정은 본질적으로 양쪽의 이해가 정반대여서 대결이 치열한 영합경기(한쪽이 얻으면 다른 쪽이 모든 것을 잃는 제로섬 게임·zero-sum game)다. 그저 상대를 누르면 되는 터라 이런 경기는 아주 간단하고 수행하기 쉽다. 그리고 권력에 대한 의지, 모든 수단들로 상대를 공격하려는 성격, 자신의 추종자들에게서 격렬한 감정을 불러내는 능력과 같은 특질이 성공에 필수적인 요소다.

하지만 선거에서 이겨 권력을 차지하면 지도자는 본질적으로 다른 상황을 맞는다. 모든 사회 구성원들의 뜻에 따라 사회를 이끌어야 하며, 무엇보다도 자기를 반대하는 시민들의 뜻도 살펴야 한다. 적대적인 사람들과 다투면서도 타협을 통해 공동의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경쟁적 성격과 협력적 성격을 아울러 가진다. 이런 비영합경기(non-zero-sum game)는 영합경기보다 물론 훨씬 어렵다.

영합경기에선 상대를 누르는 것이 단 하나의 목표이므로 상대의 처지나 욕구들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저 상대를 이기는 길만 찾으면 된다. 대결이 끝난 뒤의 일들에 대해서, 예컨대 패배한 상대와의 공존과 같은 일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래서 그런 경기에 필요한 지도력은 싸움터처럼 평면적이다. 공동의 이익이라는 차원도 없고 시간이라는 차원도 없는 2차원적 지도력이다.

공동의 이익과 시간이라는 차원들이 존재하므로, 비영합경기에선 4차원적 지도력이 요구된다. 여기서 정치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반대 정치 세력의 지도자들과의 협력이다. 지도자는 그들을 통해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시민들과 소통하고 설득해야 한다.

원래 대통령과 같은 행정적 지도자가 지닌 지도력은 ‘원격적 지도력(leadership at a distance)’이다. 지도자와 추종자들은 서로 직접적 영향을 미치지 않고, 매개 기능을 수행하는 정부 조직, 대중매체 및 시민단체들을 통해서 관계가 유지된다. 대통령이 원격적 지도력을 발휘하는 데서 야당 지도자들은 아주 중요한 매개자다. 성공한 정치 지도자들은 반대 세력의 지도자들을 통해서 반대 세력과 소통했다.

영합경기에 몰두해온 정치 지도자가 단숨에 비영합경기를 잘할 수는 없다. 지도자가 자신의 책무와 그에 따르는 지도력의 성격에 대해 또렷이 인식하더라도, 2차원적 지도력으로 성공한 사람이 단숨에 4차원적 지도력을 발휘할 수는 없다. 반대자들에 대한 본능적 반응, 무의식적 신념, 반대 세력을 믿어야 하는 상황에 대한 두려움, 마음에 새겨진 습관들은 마음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적 지도력이 요구되는 현대 사회에서도 4차원적 지도력을 성공적으로 발휘한 지도자는 찾기 어렵다.

단순한 영합경기에서 2차원적 지도력을 닦아온 지도자가 복잡하고 분화된 현대 사회를 이끄는 데 필요한 4차원적 지도력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먼저 사회의 본질과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지도력이 발휘되는 마당이 사회이므로, 사회의 성격에 대한 깊은 이해가 국정을 맡은 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자, 그렇다면 사회란 무엇인가? 다음 글에선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봅니다.

복거일 소설가·사회평론가
#지도력#리더십#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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