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20여 년 만에 다시 큰 위기를 맞았다. 일본, 러시아를 향한 적극적 행보는 외교적 자신감보다는 위기에 따른 초조함의 결과로 보인다.”(정부 고위 관계자)
북한이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하고 있다. 납북 피해자 문제 해결과 대북 경제 원조를 맞바꾸는 북-일 교섭 급진전과 러시아와의 경제협력 확대로 재미를 보기 시작한 북한이 남북 관계에도 손을 뻗치고 있다. 아프리카도 공략 대상으로 떠올랐다. 이수용 북한 외무상이 5월 24일부터 1개월 넘게 알제리 가봉 이집트 이란 등을 돌았다. 이용남 무역상은 5월 24일∼지난달 6일 러시아, 시리아를 방문해 경제협력을 논의하는 전방위 외교에 나섰다.
북한은 1994년 김일성 사망을 전후한 20년 전의 급격한 정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 대규모 아사자로 신음하고 정권 붕괴의 위기를 겪었다. 그런 뼈아픈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공세적 외교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8일은 김일성 사망 20주년이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1990년 한소 수교, 1992년 한중 수교 및 중국, 옛 소련의 대북정책 변화는 북한의 안보와 경제에는 악몽이었다”며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와 한중 관계의 급속한 개선이 진행되는 현 동북아 정세에서 북한은 20여 년 전의 위기를 떠올리는 것 같다”고 말했다.
1990년대 초 한중, 한소 관계 정상화는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함께 전통적인 북-중, 북-소 관계를 뒤흔들었다. 냉전 시대의 무상원조가 사라지고 돈을 내라는 요구를 받았다. 이런 가운데 김일성이 1994년 사망하면서 북한은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20년이 지난 2014년 현재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보다 한국을 먼저 찾아 박근혜 대통령과 공동성명을 만들어낸 것도 북한엔 큰 부담이다. 정부 관계자는 “북한 정권 내부에서 중국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고 있다”고 말했다.
대중 경제 의존도가 90% 이상인 북한은 새로운 생존 전략을 찾을 수밖에 없다. 북한이 최근 러시아와 경제협력 확대에 나선 것도 20년 전 악몽을 떠올린 결과일 가능성이 짙다. 1990년대 초 북-소 교역은 북한 총 무역량의 60%에 달했다. 한소 수교에 놀란 북한 김일성은 1990년 장쩌민(江澤民) 당시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 “남조선(한국) 정부를 승인하지 말아 달라. 하더라도 시기를 늦춰 달라”고 했지만 중국은 북한을 외면했다. 이런 악몽을 피하려는 시도가 러시아에 대한 공세적인 구애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있다.
북한은 20년 전 핵개발 협상카드로 북-미 관계 개선을 모색했다. 현재의 미국 민주당 정부는 북한에 속았다며 북핵 문제로는 보상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이 눈을 돌린 대상이 일본이다. 한소 수교 당시 외교부장, 한중 수교 당시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였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역할도 주목된다. 20년 전 최악의 위기를 지켜본 그가 김정은의 옆에서 외교 전략 수립에 개입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1990년대 초 북한의 위기의식은 적극적인 남북대화 모색으로 이어졌다. 남북기본합의서(1991년),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1992년)이 잇따라 나왔다. 하지만 한반도 주변 정세는 20년 전과 닮았지만 달라진 점도 많아 북한이 순응하는 방식의 남북대화를 되풀이할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힘이 급속히 빠진 옛 소련과 저개발국에 불과했던 중국이 북한을 포기하다시피 한 1990년대 초의 역학구도와도 현저하게 달라졌다. 중국은 아시아의 맹주로 떠올랐고, 러시아도 강대국 위상을 회복했다. 북한의 후견세력이 건재하다는 의미다. 정부 관계자는 “중국이 한국에 접근하는 것은 미국의 대중 포위망, 한미일 동맹에서 한국을 떼어놓고 싶어 하는 속내이지 북한을 버리겠다는 의사 표시는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북한 내부적으로도 배급제가 무너져 아사자가 속출했던 당시와는 사정이 다르다.
정부 관계자는 “한국이 20년 전처럼 북한을 고립시킨다는 단순한 방식의 외교 전략으로 접근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북한의 공세적 외교를 남의 일 보듯 지켜보는 데서 벗어나 북한 문제에 창조적으로 개입하고 북한을 변화시킬 묘안을 전 방위적으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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