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변방인 우크라이나 국경분쟁에서 촉발된 이번 사건이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강대국과 지도자들 간의 역학 관계에서 중대 변수로 떠올랐다. 말 그대로 틀을 바꾸는 ‘게임 체인저(Game Changer)’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지구촌의 중대 현안을 책임지고 조율할 국가그룹이 없는 ‘G제로(G0) 시대’의 현주소가 그대로 드러나기도 했다.
○ 러시아 비난에 한목소리
시리아 내전과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러시아에 밀려 존재감을 발휘하지 못했던 미국은 위상 하락을 조금이나마 만회할 기회를 잡았다. 특히 지난달 미 월스트리트저널(WSJ) 여론조사에서 국정 지지율이 41%까지 떨어지며 조기 레임덕 조짐을 보였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연일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정조준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18일(현지 시간) 백악관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사건의 책임을 사실상 러시아에 돌렸다. 그는 “여객기가 친러시아 반군 장악 지역에서 발사된 지대공 미사일에 맞았음을 시사하는 증거가 있다”며 “러시아가 국제기구의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추가 경제 제재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과 EU 국가들도 비난 수위를 높이며 ‘서방 블록’을 강화하고 있다. EU 국가들은 러시아가 가스 공급원인 점을 고려해 올해 초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 때 러시아 제재에 적극 참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19일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와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 총리가 EU와 러시아의 관계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번 사건은 러시아 제재에서 유럽을 깨우는 ‘호출신호’가 됐다”고 전했다. 캐머런 총리는 이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등 러시아 제재에 소극적이었던 EU 지도자들에게 “러시아를 향한 분노를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라며 “이번 사건은 러시아가 주권국가를 흔들고 영토를 침범하고 잔학한 반군을 조장해온 결과”라고 주장했다. 메르켈 총리도 19일 푸틴 대통령과 통화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주관하는 철저한 국제조사를 벌이는 데 합의했다.
그동안 국제 이슈에 거의 목소리를 내지 않던 국가들도 가세하고 있다. 존 키 뉴질랜드 총리도 20일 기자회견에서 “푸틴 대통령이 나서서 친러시아 반군들을 뒤로 물러나게 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 러시아 “중국이 기댈 언덕”
반면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은 이번 사건으로 사면초가(四面楚歌) 상태에 몰렸다. 푸틴 대통령은 페트로 포로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선출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에서 러시아군의 개입 명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당분간 우크라이나 반군을 지원하며 세력 확대를 꾀하기 힘들어졌다.
러시아의 고립이 가시화하는 형국이지만 이번 사건으로 국제사회가 더 혼란해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러시아와 신밀월기를 보내고 있는 중국이 부상하는 데다 미국이 과거처럼 강력한 외교 블록과 리더십을 바탕으로 세계 전략을 짜기 어렵기 때문이다.
중국이 아직 뚜렷한 압박을 가하지 않는 것은 푸틴 대통령이 한숨 돌릴 수 있는 요인이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20일 친중 매체인 홍콩 원후이보의 ‘러시아, 독단적인 사고 원인 발표 반대’ 기사를 실었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민간 무장세력의 로켓 공격을 비난했는데 증거가 어디 있느냐’는 주장도 실었다.
뉴욕타임스(NYT)는 20일 미국이 최근 러시아 핵심 에너지기업과 금융기관을 대상으로 추가 제재에 나섰지만 러시아 기업이 중국의 저금리 자금에 의존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어 러시아를 고립시키려는 미국의 실행력이 약해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일각에선 이번 사건으로 주요 2개국(G2)인 미국 중국 간의 이해관계가 더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앞으로 주요 국제 이슈에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어느 쪽도 밀리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사실상 누구도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는 ‘G0’ 상태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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