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이상(李箱)이 25세에 쓴 절절한 러브레터를 22일 최초로 공개한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문학평론가)가 이상의 연작시 ‘오감도’의 미발표작은 1936년 발표된 연작시 ‘역단(易斷)’과 ‘위독(危篤)’이라는 주장을 내놓았다.
국내 이상 연구의 권위자인 권 교수는 24일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이상의 집’에서 열리는 특별강연에서 이상이 1935년 고 최정희 작가에게 쓴 러브레터와 함께 문학계의 오랜 관심을 끌어온 오감도 미발표작에 대해 설명할 예정이다. 24일은 오감도가 세상에 나온 지 꼭 80주년이 되는 날이다.
21일 만난 권 교수는 “오랜 연구 끝에 1936년 가톨릭청년, 조선일보에 발표된 연작시 ‘역단’ 5수와 ‘위독’ 12수 등 17수가 오감도의 미발표작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이상은 1934년 7월 24일부터 8월 8일까지 15번에 걸쳐 오감도 연작시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다. 본래 30여 수를 지어놨지만 “시가 너무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거센 항의로 중간에 연재를 그만두는 수모를 겪었다. 이에 따라 끝내 빛을 보지 못한 미발표작 10여 수가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오감도는 우리나라 모더니즘 문학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이상이 스스로 ‘조선의 악의 꽃’이라고 부를 정도로 애착을 가졌다. 이 연작시는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수학 기호와 도형을 중간에 넣는 등 파격적 작품이었다.
권 교수가 최근에 펴낸 ‘오감도의 탄생’(태학사)에 따르면 역단과 위독은 모두 한자를 병용하고 띄어쓰기를 무시한 산문체로 오감도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또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자신을 그리는 등 소재도 오감도와 긴밀히 연결된다.
권 교수는 “오감도 연작의 경우 시마다 별도 제목 없이 숫자를 붙여 구별했지만 역단과 위독은 연작 전체의 제목이면서 동시에 개별 시의 제목이기도 했다”며 “역단과 위독이 큰 틀에서 오감도의 일부로 묶여 있었다가 별도로 발표하면서 제목을 나중에 붙인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가 오감도의 미발표작을 찾아 나선 건 17년 전인 1997년. 이상과 함께 ‘구인회’ 멤버였던 소설가 박태원의 회고록에서 오감도 미발표작이 있다는 내용을 읽은 뒤였다. 회고록에는 이상이 오감도 연재 중단 직후 “왜 (나를)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뒤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중략) 2000점에서 30점을 고르는 데 땀을 흘렸다”고 언급한 사실이 적혀 있다.
오감도와 역단, 위독을 하나로 놓고 보면 이상의 시 주제가 거시적인 관점에서 점차 자기 내부로 바뀌게 됨을 알 수 있다. 권 교수는 “오감도 4호부터 변화의 조짐이 엿보이는데 위독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죽음을 얘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이상은 일본에서 숨을 거두기 한 해 전인 1936년 10월 위독을 발표한다.
권 교수는 “서양 학자들이 이상의 시와 소설을 접하고 그의 문학적 상상력에 감탄했다”며 “이상은 식민지 한국 근대문학의 후진성을 극복한 작가”라고 강조했다. 이상 문학의 세계화를 꿈꾸는 권 교수는 28일 미국으로 출국해 1년간 버클리대에서 한국 문학을 강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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