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이 보는 대한민국의 ‘맨얼굴’은 아름답지 않았다. ‘국가대혁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워드 클라우드(Word Cloud·빈도수가 높은 순으로 단어를 크게 표시하는 그래픽)로 그려 보니 부정부패 척결 관피아(관료+마피아) 등의 부정적 단어들이 동그라미 중앙을 뒤덮었다. 성실 청렴 신뢰 등 긍정적 단어는 작은 글씨로 표시된 채로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국가대혁신이 필요하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문제는 개혁을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과 제기된 적폐(積弊)를 어떻게 확실하게 뿌리 뽑느냐다. 국가적 역량을 하나로 모아 전반적인 개혁을 하지 못한다면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요원해진다. 그래서일까. 국민들은 “세월호 참사야말로 대개혁을 위한 절호의 기회이며 이번에는 절대로 ‘골든타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 혁신이 필요한 이유, 공정-안전-경제 순
설문 결과 가장 큰 특이점은 국가대혁신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 일반 국민과 전문가 모두 ‘공정한 사회’를 최우선으로 꼽았다는 것이다. 2위는 ‘안전’이었다. 과거에 자주 1위에 올랐던 경제성장 항목은 일반인 조사에서는 3위에 랭크됐고 전문가 조사에서는 응답률 1%로 완전히 뒤로 밀렸다. 이는 민심이 하드웨어의 발전보다는 소프트웨어의 성숙을 간절히 바라는 쪽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뜻한다.
국민들은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중복 응답)으로 ‘뿌리 깊은 부정부패’와 ‘기본과 원칙 경시’를 꼽았다. 일반 국민은 ‘뿌리 깊은 부패’(67.4%)를 가장 많이 꼽았고 전문가들은 ‘원칙 경시와 준법정신 부재’(77%)를 가장 많이 지적했다. 일반 국민은 이어 ‘빈부격차와 양극화 심화’(57.8%), ‘지연 학연 등 끼리끼리 문화’(51.9%)’를 많이 꼽은 반면에 전문가들은 ‘정치이념 갈등’(68%), ‘빈부격차와 양극화 심화’(67%) 순으로 응답했다.
○ “지도층, 일반 국민보다 무능하고 부도덕하다”
국민이 보기에 정부와 지도층은 개혁의 대상인 동시에 신뢰할 수 없으며 문제해결 능력도 부족한 것으로 평가됐다. 무능한 지도층이 아래로부터의 지지를 얻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 실패한 갑오개혁의 사례가 120년 후인 오늘날에도 반복될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먼저 정부의 능력이 상당한 불신을 받고 있었다. 일반 국민과 전문가들은 ‘정부가 현재 정치·경제·사회 문제 해결 능력이 있는가’란 질문에 낙제점(일반 국민 4.48점, 전문가 4.56점)을 줬다. 또 일반 국민이 생각하는 국가지도층의 전문성은 4.44점으로, 민간 부문의 전문성(5.45점)에 뒤졌다. 전문가 설문에서는 그 차이가 더 커졌다(국가지도층 4.99점, 민간부문 6.87점).
이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뒤 우리 정부와 지도층이 보여준 총체적인 무능함 때문으로 풀이된다.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을 잡기 위해 역대 최대 규모의 검경 인력을 동원해 수색에 나섰지만 당사자의 변시체를 발견하고도 40일간 몰라보고 헛고생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사회지도층은 능력뿐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도 자질을 의심받고 있었다. 일반인 설문에서 일반 국민의 준법 점수는 5.26점이었지만 지도층은 3.36점을 받았다.
사회지도층은 국민의 신뢰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일반 국민의 56.9%와 전문가의 73.0%가 정치인을 가장 시급한 개혁 대상으로 꼽았으며 국민신뢰도 최하위도 정치인(0.8%)이었다. 법조인(1.9%) 역시 국민신뢰도가 바닥이었다. 반면에 일반 국민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대상 1위로 꼽은 것은 ‘일반 국민(22.2%) 자신’이었고, 다음은 시민단체(20.7%)였다. 종교계에 대한 신뢰(8.5%)는 예상보다 낮았다. 권력과 금력(金力), 지력(知力)이 있는 자는 모두 썩었으니 ‘믿을 건 우리 자신밖에 없다’는 인식이 강하게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사법제도에 대한 불신 역시 상상을 넘어섰다. ‘우리나라 법은 모든 사람 앞에 평등한가’란 질문에 대한 답변 평균은 10점 만점에 4.36점에 불과했다. 일반 국민 응답자 중 9점(0.7%)과 10점(1.3%)을 준 사람은 각각 1% 안팎에 불과했다. ▼ “정부, 민간보다 무능… 정치인 개혁1순위” ▼
무엇부터 어떻게 바꿔야 하나
○ 젊은층일수록 미래에 부정적
“어느 집단이나 마찬가지예요. 집안 배경 좋은 사람들과는 출발선이 다를 수밖에 없어요.”
서울의 한 의원에서 일하고 있는 의사 김모 씨(31)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면허를 취득했지만 수련의 과정은 아직 밟지 못했다. 학교 동창생들은 대부분 인턴을 거쳐 레지던트로 일하면서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한 과정을 밟고 있다.
그는 집안 형편으로 인해 대학에 다니는 동생의 학비를 대고, 생활비도 일부를 보태야 한다. 병원에 들어가 수련의로 일하면 일부 월급이 나오긴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엔 역부족이다. 그는 수련의 과정을 미루고 일반 의원에서 돈을 벌고 있다. 김 씨는 “앞날이 불투명하니 여자 친구와 결혼 계획은 잡지 못하고 있다”며 “의사 사회도 이제는 집안 배경이 성공의 관건이 됐다”고 말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이제 옛말이 됐다. 설혹 용이 나더라도 하늘로 오르지 못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젊은 사람일수록 대한민국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내다봤다. ‘10년 뒤 대한민국의 경제’를 묻는 질문에 일반 국민은 좋아질 것(31.5%)과 나빠질 것(35.3%)이라는 전망에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30, 40대 응답자는 각각 40.7%, 45.1%가 나빠질 것이라고 예상해 60대 이상(25.9%)과 크게 다른 견해를 보였다.
전문가들은 57.0%가 경제가 나빠질 것이라고 응답해 일반인과 큰 차이를 보였다. 좋아질 것이라는 응답은 16%에 불과했다.
○ “진정한 선진국 되려면 25∼27년 걸린다”
우리나라가 1인당 국내총생산(GDP) 5만 달러 안팎의 미국 독일 같은 선진국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놀랍게도 일반 국민은 26.7년, 전문가는 25.4년으로 비슷한 답을 내놨다.
일반 국민은 나이가 어릴수록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라고, 나이가 많을수록 시간이 짧게 걸릴 것이라고 내다봤다. 나라의 미래와 선진국 진입 시기에 대해 세대 간 온도차가 뚜렷했다.
김영란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는 “50, 60대는 압축성장을 경험하고 경제성장 혜택을 누린 반면에 30, 40대는 경제성장 혜택은 못 누리고 경쟁에만 내몰린 세대”라며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한편 선진국 진입 기간을 가장 비관적으로 본 세대는 ‘20대 여성’이었다. 무려 40.42년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이는 20대 남성보다 13.6년이 더 길다.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둔 남모 씨(26)는 “사회 전체에 성차별적 문화가 산재한 데다 정부와 기업의 모성보호 정책은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 에필로그: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행복은 자꾸 비싸지는데 우리는 꿈을 살 수 있을까?’
실업, 카드 빚에 고통받는 20대 청춘들의 자화상을 그린 영화 ‘마이 제너레이션’(2004년)은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이 질문은 10년이 지난 오늘날도 유효하다.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은 3%대에서 머물고 있다. 잠재성장률도 3%대로 내려앉았다. 고성장 시대는 끝났고 저성장 시대가 도래했다. 파이는 커지지 않는 상태에서 한정된 자원을 서로 가져가기 위해 사회 곳곳에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사회 통합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김병준 국민대 교수는 “현재 한국은 정부는 재정 역량이 부족하고, 시장은 규제에 묶여 있으며, 시민사회는 자율성을 갖지 못해 어느 영역도 활성화되지 못한 상태에 처해 있다”며 “한마디로 총체적 위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과거 개발독재 시대처럼 국가가 더이상 경제와 사회를 주도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설문 결과에서 밝혀진 것처럼 시민사회와 기업의 역량이 이미 정부를 넘어섰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정부는 시장과 시민사회가 잘 성장할 수 있고 부정부패가 끼어들 수 없도록 ‘공정한 심판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 설문에 참여한 전문가 명단(가나다순)
<정치인> 김형오 전 국회의장, 김효재 전 대통령정무수석,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 우윤근 새정치민주연합 정책위의장,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 주호영 새누리당 정책위의장
<사회 분야> 김진모 대검찰청 기획조정부장, 김현 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박철수 반값고시원운동본부 대표, 윤준 서울중앙지법 파산수석부장판사, 이민웅 전 한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이지문 공익신고센터장, 이진강 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정형식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
<학계> 국양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김동원 고려대 노동대학원장, 김민호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김영란 숙명여대 사회심리학과 교수, 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박길성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박원호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박재완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 이창우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 조신 연세대 글로벌융합기술원장, 조영달 서울대 사회교육과 교수,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종교·문화·스포츠계> 류중일 삼성라이온즈(야구) 감독, 백도웅 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신치용 삼성화재(배구) 감독, 심재명 명필름 대표, 안호상 국립극장장, 월주 스님, 유시찬 전 서강대 이사장, 유재학 울산모비스(농구) 감독, 최동호 전 고려대 교수, 편장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장
※명단은 동아일보 기자들이 추천한 각 분야 전문가 50명의 이름. 리서치앤리서치(R&R)는 익명 설문 진행. ○ 어떻게 조사했나
일반 국민에 대한 설문조사는 조사 전문기관인 리서치앤리서치(R&R)에 의뢰했다. 전문가 100명에 대한 조사는 절반은 R&R가, 나머지는 동아일보가 담당해 R&R가 통계를 냈다. 일반 국민 표본 선정을 위해서는 지역, 성, 연령별 인구 비례에 따른 할당 추출법을 사용했다. 설문조사는 22, 23일 이틀 동안 유무선 임의번호걸기(RDD) 방식을 이용해 전국 19세 이상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전화면접조사(CATI·Computer Aided Telephone Interview) 형식으로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5%포인트. R&R의 전문가 설문조사는 부문별 전문가 리스트에서 50명을 추출해 온라인 조사 형식으로 실시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9.8%포인트. 동아일보는 편집국 기자 320여 명을 상대로 분야별 전문가를 추천받아 전화 또는 e메일로 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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