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칼럼] 박영선은 ‘민주당 박근혜’가 될 수 있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3일 21시 08분


진실과 정의수호 자처하지만 서울시장 경쟁 박원순은 말했다
“혼자 정의 세웠다곤 생각마시라”
세월호법 안 되면 보이콧!… 초강경 볼모정치에 선거참패
선악논리 친노-486 정서 빼내야… 黨도 살고 나라도 구한다

김순덕 논설실장
김순덕 논설실장
“박영선 기자와 출장 가서 같은 방에 묵었다. 다음 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오프닝 멘트 하는 방송이 예정돼 있었는데, 한밤중에 방문 열고 들어오는 연습을 3000번은 하더라.”

30년 전 들은 얘기인데 잊혀지지도 않는다. 그렇게 집요할 만큼 치열하게 노력했으니 MBC 첫 여성 단독 앵커도 되고 정계 입문 10년 만에 첫 여성 원내대표, 새정치민주연합 박영선이 탄생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게 전부일 리 없다. 나는 ‘박영선 정치’를 움직이는 힘이 정의감이라고 본다. 그는 2011년 서울시장 출마 때 ‘진실과 정의의 아이콘’을 자처했고 올 초 원내대표 출사표를 던질 때도 “무너진 대한민국의 정의를 되살리겠다”고 강조했다. 자신이 옳다는 확신에 좌고우면 없이 나서다 보면 어느새 맨 앞에서 짱돌을 던지는 일은 순수하고도 고지식한 사람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념적으로 완전 진보는 아닌데 강경으로만 치면 상중하 가운데 상”이라고 평한 의원도 있다.

문제는 그의 정의감과 세상의 정의가 꼭 같지는 않다는 데 있다. 오죽하면 서울시장 후보단일화 토론 때 “정치인이 모금 전문가와 다른 점은 정의의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간다는 것”이라는 그의 말에 당시 박원순 변호사가 “박 의원 혼자 정의를 세웠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각자 자신의 영역에서 한 것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겠나.

안타깝게도 박영선은 지금도 혼자서만 정의를 붙들고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외국인투자촉진법을 막으려 든 것이 여전히 옳다고 주장하는 것도 1980년대 운동권 논리와 다를 바 없다. ‘강경 영선’에 대한 재계의 우려에 “나를 반대하는 기업은 꼼수를 써서라도 돈만 벌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기업일 것”이라더니, 7·30 재·보선 직전엔 “세월호 특별법 통과 없이는 국회에서 그 어떠한 법도 우선할 수 없다”며 늘 자기만 정의롭다는 식이다.

야당의 패배엔 이런 박영선의 막무가내 정의감도 크게 작용했다. 운동권 출신 486을 업고 강한 야성을 주장하며 김한길 안철수 공동대표의 온건노선에 대립각을 세운 것도 박영선이었다. 그런데도 지도부가 퇴진하면서 그가 비상대권을 쥐게 됐으니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쯤에서 박영선은 자신의 정의감이 그리도 옳은 것인지 가슴에 손을 얹고 따져보기 바란다. 정치에선 옳은 일만 중요한 게 아니라 되는 일도 중요하다. 486에 대한 부채의식에서, BBK 수사 후폭풍으로 이산가족이 됐다고 정의감을 불태우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윤평중 한신대 교수는 “만사를 선악의 논리로 보는 운동권 정서가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통렬하게 보여준 것이 이번 선거 결과”라고 했다. 그런데도 486은 “야당이 야당답지 못해서 패한 것”이라며 박영선이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나서 개혁성과 선명성의 각을 더 세워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친노(친노무현)가 ‘만만한’ 한명숙 전 총리를 당대표로 내세워 결국 ‘종북 연대’ 공천을 해버린 2012년 총선 직전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박영선은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를 롤모델로 들며 “정치적 스승이었던 헬무트 콜 총리의 비리를 지적하면서 성장했다”고 한 적이 있다. 더 놀라운 건 메르켈이 마초들에게 배웠고 이용당하는 척 이용했으며 나중엔 가차 없이 버리는 정치력도 지녔다는 점이다. 독일까지 갈 것도 없다. 2012년 총선 직전 비대위를 맡은 박근혜 대통령도 외부인사를 수혈하고 당명까지 바꿔 그야말로 가죽을 벗기는 혁신을 했다. 당시 박영선은 “2004년엔 차떼기 오명 씻겠다고 천막당사 치고 국민을 현혹했지만 이젠 안 속는다”고 비웃었으나 국민은 감동했다. 지난 총선에서 이긴 쪽은 새누리당이었고 야당은 지금까지도 처절한 패배다.

이제 박영선은 자타가 공인하는 대선주자 후보급이다. “앞으로 큰일을 하실 분인데 강경하면 국민이 안 좋아한다고 말하면 굉장히 수그러들더라”는 말도 당 안팎에서 나온다. 영국의 진보당도, 보수당도 야당 때는 한참 더 중간으로 가야만 집권이 가능해진다고 영국 맨체스터대 제인 그린 교수는 강조했다. 이번에 그가 비대위원장을 맡고 안 맡고보다 중요한 것은, 강경 선명 진보 좌클릭을 외치는 뻔한 그들을 메르켈처럼 끊어내는 일이다.

‘새 정치’의 허망함이 드러난 지금, 시대착오적인 친노 486당으로 도로 갈 수 없도록 당명까지 정통민주당으로 바꿨으면 좋겠다. 그래야 야당이 살아나고 박영선도 ‘민주당의 박근혜’가 될 수 있다.

김순덕 논설실장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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