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이재명]대통령의 역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7일 03시 00분


이재명 정치부 차장
이재명 정치부 차장
새누리당의 ‘투톱’인 김무성 대표와 이완구 원내대표의 ‘첫 접촉’은 20년 전인 199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원내대표가 충남지방경찰청장을 지낼 때다. 44세 혈기왕성한 청장은 파출소까지 순시를 다녔다. 그러자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다. “청장이 왜 정치를 하고 다니냐”는 핀잔이었다. 그때 전화한 이가 대통령사정비서관이었던 김 대표다. 이 청장은 “칭찬은 못할망정 무슨 소리냐”며 쏘아붙였다.

‘일개’ 지방청장이 실세 비서관에게 맞선 것이다. 그가 ‘객기’를 부린 건 ‘든든한 백’이 있어서다. 바로 김영삼(YS) 대통령이었다. 1991년 이 원내대표의 모친상 때 우연히 상가를 찾은 YS는 ‘엘리트 경찰 이완구’를 머릿속에 입력해뒀다. 대통령이 된 YS는 1993년 충북 방문 당시 충북청장이던 이 원내대표를 만나자 박관용 대통령비서실장 등에게 “이완구는 내 친구”라고 소개해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YS는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이 원내대표를 차출했다. 당시 자민련이 충남을 싹쓸이할 때 이 원내대표는 여당의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러니 얼마나 기특했겠나. YS는 초선 의원 이완구에게 전화를 걸어 “장관을 시키고 싶은데 아직 초선이니 당 대표 비서실장부터 하라”며 당직을 챙겨줬다.

YS의 총애를 한몸에 받던 이 원내대표에게 1997년 2월경 청와대 핵심 인사가 찾아왔다. “(YS의 차남) 김현철 씨와 관련한 문제를 우리가 보고하기 힘드니 이 의원이 나서달라”는 것이었다. 이 원내대표는 A4용지 2장짜리 ‘김현철 보고서’를 만들어 YS에게 건넸다. 파장은 ‘에볼라 바이러스’급이었다. YS는 이 원내대표에게 불같이 역정을 냈다. 이 원내대표가 YS를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11년이 지난 2008년이었다. 대통령의 역린을 건드린 대가였다.

역대 대통령에겐 모두 역린이 있었다. 역린을 건드린다는 건 용기의 문제가 아니다. 때론 목숨을 걸어야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형 이상득 전 의원과 맞선 정두언 의원처럼 말이다. 하지만 역린이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될 때 정권은 예외 없이 곤두박질쳤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전 보좌관 출신 정윤회 씨 논란을 현 정부가 역린으로 방치해선 안 된다. 정 씨는 인사 비선(秘線) 의혹을 넘어 세월호 참사 당일 박 대통령을 몰래 만난 당사자로 떠올랐다. 한국 신문의 한 칼럼에서 소개한 풍문(風聞)은 일본 신문에까지 보도되면서 점점 그럴싸한 얘기가 돼가고 있다.

청와대는 정 씨 얘기만 나오면 질겁한다. 박 대통령이 이 문제에 얼마나 예민한지 아는 탓이다. 너무 황당무계해 예민할 수도 있다. 또 정 씨 관련 의혹은 아직까지 실체가 없다. 없는 것을 없다고 밝히는 것도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청와대의 침묵은 세간의 호기심을 점점 자극하고 있다. 조사할 사안이 아니라면 명쾌한 해명이라도 있어야 한다. 지금은 정 씨의 행적보다 청와대의 침묵이 더 미스터리다.

이재명 정치부 차장 egija@donga.com
#김무성#이완구#역린#박근혜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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