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기선 한서대 총장(74)은 ‘호기심 덩어리’다. 아직도 새로운 것을 보면 소년처럼 눈을 반짝인다. 단순하고 엉뚱하다. 뭐든 한번 필이 꽂히면 기어이 해봐야 직성이 풀린다. 끌리는 것에 무턱대고 빠져든다. 일단 저지르고 본다. 그러다가 뒷감당을 못해 쩔쩔매곤 한다.
함기선은 내포사람이다. 아산만 천수만 가로림만의 태안반도 일대가 그곳이다. 가야산(678m)을 중심으로 예산, 서산, 홍성, 당진, 태안, 아산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있다. 함기선은 예산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3남 3녀의 장남. 부끄러움 많은 소년이었다. 예산농고시절 선생님의 성화에 학생회장선거에 나갔지만, 정견발표 때 인사만 꾸벅하고 내려올 정도였다.
“난 너무 내성적이어서 수업시간에 스스로 나서서 뭘 발표한 기억이 없다. 그래도 뭔가에 한번 빠지면 다른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세포라고나 할까. 도대체 이런 ‘무데뽀 기질’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중2 때 사진에 홀린 것도 그렇다. 카메라가 너무 갖고 싶어 어머니 앞치마주머니의 돈을 훔쳐 기어이 사고야 말았다. 어머니가 ‘돈을 누가 가져갔느냐’고 물으셨지만 난 딱 잡아뗐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부리나케 동네사진관으로 달려가 그 집 아저씨로부터 현상과 인화를 배웠다. 나중엔 우리 집 다락방에 암실을 만들어놓고 직접 인화까지 했다. 휴일엔 3학년 선배들의 ‘여학생 데이트’ 사진을 도맡았다. 사진경비는 물론이고 출장비까지 받았다. 쏠쏠했다. 맨날 놀다보니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아뿔싸! 2학년 말 점수가 낙제점(59점)이 나왔다. 천만다행으로 1, 2학기 평균이 60점이 넘어 ‘가(假)진급’은 했지만 망신살이 뻗쳤다. 난 망치로 그렇게 아끼던 카메라를 깨부숴버리고 그 길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렇다. 함기선은 자신에게 칼 같다. 일단 아니다 싶으면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문제는 그 넘쳐흐르는 호기심이었다. 누가 뭐라 하면 금세 솔깃했다. 중학교 때 유달영 선생(1911∼2004)의 강연을 듣고 과수원 경영을 하려고 농고에 진학했던 것이 그 좋은 예다. 그러다가 예산읍내의 한 외과병원이 동네사람들의 칭송을 받자 의사가 되겠다고 진로를 바꿨다. 의대 본과 3학년 땐 등록금을 광산에 투자했다가 돈을 모두 날렸다. 엑스레이촬영장비 공장을 차렸다가 문을 닫았고, 의사 초년병 시절 개인병원을 열었다가 역시 빚더미에 앉기도 했다.
“1972년부터 구순구개열(언청이)무료수술 봉사에 몰입했다. 당시 비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언청이환자가 4만 명에 달했다. 한해 250번이나 수술한 적도 있었다. 그 이후 2000번 가까이 수술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무슨 거창한 사명감이나 그런 것을 가지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수술이 끝난 후 예쁜 입술의 아이들이 환하게 웃는 게 너무 기뻤다. 의학적 연구도 하고 싶었다. 언청이수술은 아무리 잘돼도 말을 못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언어치료에 빠졌고, 관련학회도 만들었다. 그 공로로 2011년 국제적십자연맹 최고상인 헨리 데이비슨 상을 받았다. 황송할 따름이다. 그저 미친 듯이 몰입하다 보니 책(구개열교정학 등)도 쓰고, 기계(인후내시경)도 개발하고, 치료사 양성사업(250여 명)까지 하게 된 것뿐이다. 언어치료를 받은 아이들이 떠듬떠듬 ‘어.머.니.사.랑.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 행복감은 이 세상을 다 준대도 바꿀 수 없을 것이다.”
1992년 함기선은 고향 가야산 자락에 한서대학교를 세웠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본인조차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1985년인가. 문득 대학설립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의사는 몇 사람의 생명을 구할 수 있지만, 교육자는 수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가르침을 줄 수 있다. 교육이야말로 최고의 의술 아닐까. 함기선은 무릎을 쳤다. 망설일 그가 아니었다. 하지만 주위에서 한사코 말렸다. 당시 대학마다 총장실점거 등 학내분규가 격렬했던 시절이었다.
“이미 내 귀엔 그런 이야기가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불도저처럼 씩씩대며 밀고 나갔다. 그 결과 죽을 고생을 했다. 시행착오도 수없이 겪었다. 해도 해도 끝이 없었다. 너무나 힘들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돈이 들어갔다. 생활비도 모자라 병원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녔다. 몇 번이나 그만두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때마다 아내가 날 잡아줬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아내는 나의 평생 버팀목이었다.”
1992년 3월 한서대의 첫 입학식(10개학과 400명)이 열렸다. 함기선은 감개무량했다.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그러다가 교가가 울려 퍼지자 마침내 울음보가 터졌다. 그 후 22년이 지난 현재 한서대는 50개 학과에 재적생 1만1000여 명으로 훌쩍 컸다. 한서대는 철저히 실용교육을 지향했다. 다른 대학에 없는 틈새에 올인했다.
항공분야에 무려 2000여억 원을 쏟아부었다. 20여만 평의 태안캠퍼스 비행장과 다른 대학에서는 꿈도 못 꿀 보잉737기를 비롯해 제트기, 헬리콥터 6대, 4인승 기본훈련기 25대 등 비행기가 45대나 된다. 이미 졸업생 중엔 조종사와 정비사가 수두룩하다. 고교성적이 상위 2%에 들어야 입학할 정도로 인기학과다. 최근엔 아시아 유일의 무인항공기학과도 개설했다.
디자인학과는 내로라하는 국제대회에서 수상자를 단골로 배출하고 있다. 미래 요트시장을 겨냥한 해양스포츠학과나 카지노전문 레저게이밍학과도 독보적이다.
“난 남 흉내 내는 게 싫다. 독특한 것이 좋다. 아마도 내가 우리나라 11번째 성형외과전문의가 된 것도 그런 유전자가 작용했을 것이다. 학교도서관에 미국 역대 대통령의 연설문집을 어렵게 구해 놓은 것이나, 학교운동장에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동상을 세운 것도 그렇다. 윤보선, 최규하 전 대통령을 모르는 학생이 태반이다. 난 무슨 거창한 꿈을 꾸고 그것에 맞춰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풀어가는 스타일이 아니다. 머리가 남보다 좋은 것도 아니다.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았을 뿐이다. 끈기는 있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6년 개근상이 그 예다. 그때 상으로 벼루를 받았는데, 그 인연인지 한국 중국 일본의 벼루 3000여 개를 수집했다. 한서대박물관에 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실수투성이 인생이었다. 다만 실수를 통해서 많이 배웠다. 그걸 바탕으로 뚜벅뚜벅 황소걸음으로 여기까지 왔다. 내 고향 예산·서산 내포천국에 교육자로 돌아왔다.” ▼ 함기선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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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1940년 6월 15일(음력) 황해도 남천 출생 ▽예산금오초등학교(1953) ▽예산중(1956) ▽예산농고(1959) ▽수도의과대(현 고려대의대 1965) ▽서울대보건대학원 석사(1967) ▽서울대대학원 박사(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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