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현두]족집게 강사의 역할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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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독이 든 성배’의 새 주인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성배를 맡기려는 쪽과 성배를 받으려는 쪽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영국 로이터통신은 2004년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직을 ‘독이 든 성배(poisoned chalice)’로 표현했다. 당시 한국 축구대표팀을 지휘했던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령탑에서 물러난 것과 관련해 한국 축구의 문제점을 꼬집는 기사에서 이 표현을 썼다. 2002년 거스 히딩크 감독 이후 한국 대표팀 사령탑에 오른 8명(감독대행 제외) 중 계약 기간을 채운 감독이 허정무, 최강희, 딕 아드보카트 등 3명에 불과하니 틀린 표현은 아니다.

10여 일 전까지만 해도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참패로 성배 속 독을 먹고 쓰러진 홍명보 전 감독의 후임이 쉽게 결정되는 듯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결승으로 이끈 베르트 판마르베이크 감독이 새로운 성배를 드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네덜란드로 날아가 판마르베이크 감독을 만나고 온 이용수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은 “일주일 안에 결정이 날 것”이라며 낙관론에 불을 지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판마르베이크 감독은 성배를 포기했다. 그는 협상 결렬 후 네덜란드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주로 네덜란드에 머물고 싶었지만 대한축구협회에서는 불가능하다는 뜻을 전했다”고 밝혔다. 대표팀이 소집되지 않을 때는 고국인 네덜란드에 있고 싶다는 것이 그의 바람이었던 반면 축구협회는 대표팀 소집과 관계없이 그가 한국에 오래 머물기를 원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부 국내 팬은 “판마르베이크 감독이 한국을 무시했다. 한국 축구에 대한 애정 없이 돈만 챙기려 한다”며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그렇다면 현재 맡은 팀이 없고 앞으로 당분간 한국 대표팀 감독 외에는 갈 곳도 없을 것 같은 판마르베이크 감독은 왜 무리한 요구를 했을까. 정말 한국을 무시할 정도로 그는 거만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오히려 축구협회의 요구가 그에게는 무리한 조건일 수 있었을 것 같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이었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그 자리의 임무는 대표팀이 최고의 전력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축구협회의 생각은 달랐다. 대표팀 경기가 없을 때도 국내에 머물며 유소년 및 국내의 다른 지도자들을 교육하기를 원했다. 이용수 위원장은 “유소년까지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는 비전을 가진 분을 뽑고 싶다”고 천명했다. 대표팀을 넘어 한국 축구 전반의 체질 개선을 맡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대표팀 감독의 임무와 역할을 넘어서는 것이다. 홍명보 전 감독은 물론이고 허정무,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에게도 요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당연히 네덜란드 감독을 지낸 판마르베이크 감독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이다.

또 하나 이해하기 힘든 것은 계약 기간에 대한 견해차다. 판마르베이크 감독은 우선 2년 계약을 하고 그 뒤 2년 연장을 논의하자고 한 반면 축구협회는 다음 월드컵까지 4년 계약을 요구했다. 서로의 요구 조건이 뒤바뀌는 것이 상식적이지만 현실은 달랐다. 그만큼 축구협회는 외국인 감독에게 한국 축구의 구세주 역할을 떠맡기고 싶은 것이다.

대표팀 감독은 입시학원의 족집게 강사처럼 대표팀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해주고 상대에 맞는 맞춤형 전략을 짜는 것이 주요 역할이다. 족집게 강사는 학생의 인성과 같은 기초 교육에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책임도 없다. 한국 축구의 기초인 체질 개선도 대표팀 감독이 아닌 축구협회의 몫이다.

이현두 스포츠부 차장 ruchi@donga.com
#축구대표팀 감독#홍명보#판마르베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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