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2개의 금메달을 따고 금의환향한 여자 양궁의 기보배는 귀국 후 열린 선수단 해단식에서 뜻밖의 눈물을 보였다.
기보배는 “개인전 금메달에 대해 운이 좋았다는 댓글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우리들은 아침 꼭두새벽부터 일어나 라이트를 켜고 나방과 싸우며 훈련했다. 또 모기에 많이 뜯기면서 정말 힘들게 훈련해왔다”며 울먹였다.
악성 댓글에 시달리며 힘들어하는 선수들이 한둘이 아니다. 선수들은 태극마크를 달기 위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붓는다. 그들에게 악성 댓글은 치유하기 힘든 상처로 남는다.
○ 4관왕 하고도 욕먹는 세상
많은 악성 댓글에 시달렸던 선수 중에는 ‘리듬체조 요정’ 손연재도 있다.
손연재는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2010년 광저우 아시아경기에서 동메달을 땄고, 2년 후 열린 런던 올림픽에서는 개인 종합 5위라는 성과를 올렸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응원했지만 그의 성공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는 ‘심판을 매수했다’, ‘국제대회 성적을 조작해 몸값을 올리려 했다’ 등 허위 사실을 지속적으로 온라인에 올리는 사람도 있었다.
런던올림픽이 끝난 뒤 손연재는 한 방송에 출연해 “몇 년간 정말 많이 울었다. 세상에 나를 응원해주는 사람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들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올해 4월 손연재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열린 국제체조연맹(FIG) 월드컵에서 개인종합 정상에 이어 볼, 곤봉, 리본 종목에서 우승하며 4관왕에 올랐다. 하지만 몇몇 악플러들은 상위권 선수들이 나오지 않아서 얻은 우승이라고 비하했고, 실력보다 가산점이 많았다고 비난의 목소리를 거두지 않았다. ○ 악성 댓글의 악순환
최근 들어 가장 많은 악성 댓글에 시달린 사람은 홍명보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일 것이다. 브라질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1무 2패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자 온갖 악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인간적인 배려나 예의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댓글도 많았다. 인터넷에 다시 이런 악성 댓글을 토대로 작성된 기사가 유통되고 그 기사 밑에 다시 악성 댓글이 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텍사스에서 뛰고 있는 추신수도 악플러들의 대표적인 표적이다. 지난 오프 시즌 7년간 1억 3000만 달러짜리 대형계약을 한 추신수는 올 시즌 전반기 발목 부상 등으로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7월 14일 추신수의 전반기를 결산하는 기사가 포털의 스포츠 부문 메인 화면에 뜨자 얼마 되지 않아 수백 개의 댓글이 달렸다. 기사 게재 후부터 5시간 동안 올라온 333개의 댓글을 본보가 분석한 결과 비속어 등을 사용하면서 인격을 모독하거나, 그를 비꼬고 헐뜯는 댓글이 80.2%(267개)나 됐다. 몇 해 전 추신수가 음주운전에 걸린 것을 비유해 ‘술신수’라고 비꼬는가 하면, ‘먹튀’라는 표현을 쓴 누리꾼도 있었다.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수치스럽다. 국적을 일본으로 바꿔라”라며 원색적인 비난을 하는 누리꾼도 있었다.
○ 국가 이미지 먹칠
한국 누리꾼들의 악성 댓글은 국제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올해 2월 소치 올림픽 여자 쇼트트랙에 출전했던 영국의 엘리스 크리스티는 한국 악플러들의 집중 공세에 시달리다 심리 치료를 받았다.
크리스티는 쇼트트랙 여자 500m 결선에서 한국의 박승희와 충돌했는데, 이 때문에 박승희는 다 잡았던 금메달을 놓치고 동메달을 땄다. 이후 크리스티에 대학 악플 공세가 시작됐다. 크리스티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사과했지만 몇몇 한국 누리꾼들은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영국 BBC 등 주요 매체들은 크리스티가 심리 치료를 받는다는 사실을 주요 뉴스로 다루며 한국 누리꾼들의 ‘사이버 공격’에 우려를 표했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때는 독일의 펜싱 선수 브리타 하이데만이 악성 댓글 포화를 받았다. 신아람의 ‘1초 오심’ 경기의 상대 선수였던 그는 ‘나치의 후손’이라는 근거 없는 비난과 과거 누드사진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에 시달리다 SNS 계정을 폐쇄했다. 당시 슈피겔 등 독일 언론들은 “이 경기의 주심을 맡았던 오스트리아의 심판도 트위터 등을 통한 한국인들의 거센 항의로 위협을 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 “제발 가족만은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젊은 선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악성 댓글에 슬기롭게 대처하는 베테랑 선수들도 있다. 은퇴한 ‘역도여제’ 장미란은 “댓글을 거의 보지 않았다.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외모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았다. 나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응원하는 사람들의 말을 듣기도 모자랐다. 그런 글에 신경을 쓰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았다”고 했다.
프로야구 두산의 홍성흔은 “욕을 먹을 때마다 상처를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팬들과 직접 대면했을 때는 모든 사람이 격려해줬고, 비판을 하더라도 애정을 담아서 했다. 악성 댓글을 쓰듯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며 “후배들에게도 ‘댓글은 팬들이 보내주는 관심의 정도이니 감사하게 받아라’라는 말을 해 준다”고 했다.
홍성흔은 누리꾼들에게 마지막 부탁도 잊지 않았다. “저에 대한 비난은 얼마든지 해도 좋습니다. 하지만 단 하나만 지켜 주셨으면 합니다. 가족만은 건드리지 말아 달라는 것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모든 운동선수의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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