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쇼와천황실록 ‘미화 논란’
야스쿠니 참배 중단 이유 안밝혀
“A급전범 합사뒤 안간다고 말한 도미타 메모 인정한 셈” 분석도
9일 공개된 쇼와천황실록은 24년간에 걸친 준비작업 끝에 히로히토(裕仁·1901∼1989·연호는 쇼와·昭和) 일왕의 일생을 기록한 사료이지만 세상에 나오자마자 객관성 시비에 휘말리고 있다.
실록은 총 61책 1만2000쪽으로 미공개 내부문서 등 3152건의 사료를 인용했다. 훗날 역사가들이 일본의 아시아태평양 침략전쟁 당시 일왕의 역할과 책임을 규명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의 전문가들은 실록의 역사관과 사실관계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호사카 마사야스(保阪正康) 일본 근대사 연구자는 도쿄신문에 “궁내청은 천황의 전쟁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다. 개전과 전쟁 때 (천황의) 모습은 모두 수동형으로 기술하고 있고 종전에 이르는 과정은 천황이 주체적으로 말한 것으로 기술했다”고 비판했다.
요시다 유타카(吉田裕) 히토쓰바시대 교수(일본 근현대사 전공)도 같은 신문에 “실록은 어느 정도 기술하고 뒤에다 출전 사료를 한꺼번에 제시하거나 제공자의 요청이라며 출전 사료 이름을 감추고 있다”며 “제3자에 의한 검증을 어렵게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마이니치신문은 실록을 분석한 결과 히로히토 일왕이 전쟁을 전후해 군 간부와의 면담이 급증했다고 보도했다. 일왕은 즉위한 뒤 1935년까지 군 간부, 정치가, 고위 관료 등 연간 200∼300명을 면담했으나 중일전쟁 발발 전년인 1936년부터 군인을 중심으로 면담이 늘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군 수뇌부가 연일 전황을 보고하기 위해 일왕을 방문해 1942년 군인 면담자는 450명을 넘었다. 일왕이 전쟁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주는 수치로 풀이될 수 있다.
실록은 패전 뒤 히로히토 일왕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 중단 이유도 명쾌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실록은 1988년 4월 28일 기록에 “야스쿠니신사의 이른바 A급 전범 합사, (천황 자신의) 참배에 관해 말하다”라고 서술했다. 또 “2006년에는 ‘도미타 메모’라는 자료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보도”라고 덧붙였다.
도미타 메모는 히로히토 일왕이 1988년 4월 도미타 도모히코(富田朝彦) 당시 궁내청 장관을 만났을 때 “어느 때 A급 전범이 합사됐다. 그래서 나는 그 후 참배하지 않는다. 그것이 내 마음이다”라고 발언했다고 기록한 메모다.
이에 대해 마이니치신문은 궁내청이 간접적으로 도미타 발언 내용을 추인한 것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산케이신문은 궁내청이 도미타 메모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정반대의 해석을 내놓았다.
히로히토 일왕은 전쟁을 둘러싸고 이중적인 행태도 보였다. 태평양전쟁 항복 직전인 1945년 7월 20일 스즈키 간타로(鈴木貫太郞) 총리를 소련에 특사로 보내 평화 중재 역할을 기대했다. 한편으로 그는 7월 30일부터 8월 2일까지 오이타(大分) 현 우사 신궁 등 신사 세 군데에 칙사를 파견해 적국 격파와 전승을 기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