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효녀가수 현숙의 ‘부모님 누워계신 내 고향 김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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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등지던 딸 손에 쥐여준 1만원, 김치 한통, 쌀 한말

김제 조정래아리랑문학관의 ‘현숙효열비’ 앞에 선 가수 현숙. 처음 효열비 소식에 부담감이 엄청나 석 달 동안 잠을 못 이루고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았다. 김제=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김제 조정래아리랑문학관의 ‘현숙효열비’ 앞에 선 가수 현숙. 처음 효열비 소식에 부담감이 엄청나 석 달 동안 잠을 못 이루고 목소리까지 나오지 않았다. 김제=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효녀가수’ 현숙(정현숙)은 12남매(6남 6녀) 중 막내딸(11번째)이다. 어머니(김순애·1922∼2007)는 문고리를 잡고 끙끙대며 혼자서 현숙을 낳았다. 논에서 모심다가 산기를 느끼고 부랴부랴 집에 들어와 출산했다. 현숙 어머니는 잠깐 누워 있다가 다시 물 벙벙한 무논으로 모를 심으러 나갔다. 어머니는 동래 정씨 종갓집 맏며느리였다. 동네가 온통 일가친척으로 집성촌이었다. 붉은 해가 동산에서 떠올라 아득한 지평선 너머 논바닥으로 사라지곤 했다.

현숙은 형제가 많아 둥글게 자랐다. 어딜 가서도 사람들과 곧잘 어울렸다. 동네 인기 넘버원이었고, 학교에서도 주위엔 친구들로 시끌벅적했다. 현숙은 새 옷을 거의 입어본 적이 없었다. 교복도 늘 언니들이 입었던 것을 이어 받았다. 검정치마가 빛이 바래 희끄무레했다. 하지만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씩씩하고 시원시원했다.

조회시간엔 애국가 지휘를 도맡아 했고, 체육은 뭐든지 만능이었다. 운동회 땐 음악선생님과 체육선생님이 서로 현숙을 데려가겠다고 신경전을 벌였다. 급기야 중학교 땐 배구선수로 뽑혔다. 그땐 큰 키(163cm)였지만, 아쉽게도 그 이후로 전혀 자라지 않았다.

“지금도 내 손이 엄청 맵다. 배구선수 흔적일 것이다. 제대로 했으면 국가대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ㅎㅎㅎ 하지만 중3 여름 합숙훈련 때 그만 허파에 ‘가수 바람’이 들었다. 당시 군산서해방송에서 노래자랑이 열렸는데 거기에 나가 엉겁결에 1등을 한 것이다. 주장친구와 가발 쓰고 듀엣으로 펄 시스터즈의 ‘커피 한 잔’을 신나게 불러 젖혔다. 그때부터 내 꿈은 가수로 바뀌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친구와 서울행 완행열차를 탔다. 가수가 되겠다고 무작정 도발했다. 온 식구들이 펄펄 뛰었지만 내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겁이 없었다. 아버지(정광진·1917∼1996)는 딸자식 버렸다며 몸져누웠다. 그때 내 손엔 어머니가 몰래 쥐여준 1만 원(당시 서울시내버스 요금 50원)과 김치 한 통, 그리고 쌀 한 말이 전부였다.”

현숙은 같이 간 친구 언니집인 뚝섬에서 묵었다. 그 친구와 그곳에서 오아시스레코드사가 있는 종로5가까지 걸어 다니며 노래연습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데뷔 곡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가 라디오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오늘도 보고파서♪ 가족사진 옆에 놓고♬ 철이 공부시키면서♩당신만을 그립니다♬∼’ 중동근로자 가족의 애타는 심정을 담은 노래였다.

그 무렵 어머니가 현숙 뒷바라지를 위해 올라왔다. 그리고 1980년 ‘가슴이 찡할까요♪ 정말로♬∼ 눈물이 핑돌까요♬∼’의 ‘정말로’가 대박을 쳤다. 김정택 SBS예술단장이 ‘밝은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현숙의 간곡한 부탁에 만들어준 곡이었다. 2년쯤 뒤엔 아버지도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마침내 서울 영등포 당산동에 현숙 가족(남동생 포함 4식구)이 둥지를 틀었다. 남부러울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10년을 채 넘기지 못했다.

“1989년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셨다. 아버지 속옷에 ‘가수 현숙 아버지입니다’와 ‘전화번호’를 새겨드렸다. 그래도 가끔 집을 나가셔서 행방불명이 되곤 했다. 도대체 어떻게 그 먼 곳까지 가셨을까. 은평구 응암동파출소에서 연락이 온 적도 있었다. 늘 불안했다. 어머니도 관절염 등 온몸이 종합병동이라 아버지 뒷바라지를 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목욕시킬 때마다 내 머리칼을 사정없이 쥐어뜯었다. 머리카락이 한 줌씩 빠졌다. 아버지는 밤새도록 고래고래 소리도 질렀다. 견디다 못해 가끔 나도 모르게 아버지에게 꽥꽥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혼자 울었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치매 어르신은 아기나 마찬가지인데 내가 왜 그랬을까. 그만큼 난 늘 잠이 모자랐다. 한번은 KBS가요무대 녹화 대기 중 깜빡 잠이 들어 차례를 놓쳤다가 나 혼자 따로 찍은 적도 있었다. 1993년엔 어머니마저 중풍으로 쓰러졌다. 말도 못하고 목에 호스를 꽂고 누워서 살아야 했다. 밥 한술 물 한 모금 할 수 없어, 돌아가실 때까지 14년 동안 호스를 통해 영양액을 공급했다. 앞이 캄캄했다. 우선 엄청난 병원비부터 벌어야 했다. 내가 공연하러 밖에 나갈 땐 언니 오빠 올케가 돌아가면서 도와줬다. 1996년 KBS 김덕기 PD가 부모 모시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찍겠다고 연락이 왔다. 난 펄쩍 뛰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부모를 모시는 것뿐이고 어머니 아버지 기저귀 찬 모습도 결코 보여주기 싫었다. 그분들도 자존심과 품위가 있는데….”

김 PD는 끈질겼다. 결국 현숙이 졌다. 김 PD는 현숙의 집에서 25일 동안 먹고 자며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렇게 KBS다큐멘터리 ‘사람과 사람들’이 방영(1996년 6월 12일)됐다. 반향이 엄청났다. 시청률 42%에 재방송까지 이어졌다. 배경음악 현숙의 ‘사랑하는 영자씨’까지 덩달아 떴다. 그때부터 현숙은 ‘효녀가수’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현숙의 아버지는 그해 12월 눈을 감았다.

“난 결코 효녀가 아니다. 정말 부담스럽다. 나 혼자 부모님을 모신 것도 아니다. 오빠 올케 언니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어떻게 가능했겠는가. 난 모신다는 말도 싫다. 부모님이 나를 곁에서 지켜주신 것이다. 2010년엔 효사랑회와 김제시에서 내 고향에 ‘현숙 효열비(孝烈碑)’를 세워주셨다. 코흘리개들은 저금통을 털고, 어르신들은 쌈짓돈을 내놓아, 전국 곳곳에서 한 달 만에 1억6800여만 원을 모았다고 한다. 난 그 소식에 어찌할 바를 몰라 석 달 동안 잠을 못 이뤘다. 한동안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다. 몸무게가 5kg이나 빠졌다. 난 결혼도 안했을뿐더러 살아있는 사람인데 그게 가당키나 한 것인가! 몇 번이나 사양했지만 막무가내였다. 어쩔 수 없었다. 그냥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눈 딱 감고 더 씩씩하게 살기로 했다. 이제는 대한민국 모든 어르신들이 내 부모님이다. 효열비엔 내 노래 부르는 모습과 그걸 듣고 계시는 어머님 아버님 동상이 있다. 부모님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선산에 계시지만 거기서도 늘 날 지켜보고 계시는 것이다. 내달 2일 지평선축제 땐 그곳에서 어르신들을 위한 제5회 효사랑음악회를 연다. ‘정말로’의 작곡가 김정택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김영임 김성환 박상민 신유 박주희 치엘로(성악가) 김혜영 씨(MC) 등이 달려와 무료출연을 해준다. 지난해엔 조영남 김동규 노사연 설운도 씨가 도와줬다. 난 정말 복 받은 사람이다.”

현숙은 억척이다. 모든 걸 혼자서 해치운다. 부모님은 생전에 6남매(3남 3녀)를 일찌감치 병치레 등으로 잃었다. 현숙의 큰오빠도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남은 형제는 이제 오빠와 두 언니 그리고 남동생뿐이다. 현숙은 매니저도 없다. 모든 스케줄은 스마트폰에 다 들어있다. 혼자서 전화 받고, 기획하고, 코디하고, 분장하고, 거기에 맞춰 준비한다. 집에 무슨 도우미도 없다. 부모님 생전에도 간병도우미가 없었다. 옷은 세일할 때 사고, 빨래도 세탁기에 빤 뒤 그냥 탈탈 털어서 말려 입고 나온다. 그렇다고 일부러 결혼을 안 한 것은 아니다. 왜 사랑하고 싶은 남자가 없었을까. 정말 좋은 인연을 맺을 뻔한 남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현숙 스스로 먼저 포기했다. 혼자 잘살자고 어떻게 아프신 부모님 놔두고 시집갈 수 있을까. 그런다고 과연 행복할까.

“부모님 떠나보낸 뒤 한 남자와 맞선을 봤다. 멋지고 훌륭한 분이었다. 나에게 왜 호감을 갖게 됐느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우리 어머님이 10년 동안 앓아 누워계신데, 현숙 씨라면 잘 모실 것 같아서였다’라고 대답했다. 난 그 얘기를 듣고 서러웠다. 집에 돌아와 혼자 한참 울었다. 결혼하면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모시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걸 굳이 조건이라고 내세우다니! 그 이후 난 굳이 인연을 찾지 않기로 했다. 강물처럼 순리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난 어디든 소풍 가듯이 공연을 간다. 난 돼지해 돼지달 돼지시에 태어났다. ‘나무에 물’ 같은 존재라고 한다. 주위사람이 모두 잘된다는 것이다. 정말 내 운명이 그럴까. 그렇다면 난 기꺼이 ‘이 세상의 복덩이’가 될 것이다.”   

▼ 고달픔 알기에… 치매노인용 이동목욕車 기증 11대째 ▼

아낌없이 퍼주는 현숙씨


대한민국 모든 어르신은 내 부모님. 현숙을 반갑게 맞는 고향 어르신들.
대한민국 모든 어르신은 내 부모님. 현숙을 반갑게 맞는 고향 어르신들.
현숙은 어딜 가든 통통 튄다. 밝고 명랑하다. 누구에게나 깍듯하다. 방송국 수위아저씨들에게도 ‘아버님 반갑습니다’라고 먼저 인사한다.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에게도 ‘어머님 안녕하세요’하고 상냥하게 안부를 묻는다.

말뿐이 아니다. 뭐든 못줘서 안달이다. 핸드백을 뒤적거려 티켓을 꺼내 준다거나, 승용차트렁크를 열어 특산물을 안겨준다. 대부분 지방 축제공연 등에서 받은 선물이다. 현숙은 베푸는 게 좋다. 즐겁다. 소아암환자를 위해 8700만 원을 내놓았고, 삼성효행상금 1500만 원, 디너쇼수익금 1억 원도 몽땅 기부했다. 노인정에 에어컨도 달아주고, 자취 학생들에게 세탁기도 보내준다. 이곳저곳에 쌀도 100∼200포대씩 보낸다.

현숙은 2004년부터 해마다 ‘치매·홀몸노인들을 위한 이동목욕차량’ 한 대씩을 농어촌에 기증하고 있다. 김제를 시작으로 울릉도, 하동, 청양, 정선, 칠곡, 장흥, 제주, 영동, 연평도를 거쳐 올 고흥까지 모두 11대에 이른다. 차량 한 대 가격은 약 5000만 원. 1.2t 트럭을 어르신 목욕시키기에 편하도록 개조한 것이다. 욕조와 보일러, 물탱크를 갖췄다.

“엄마를 목욕시킬 때마다 너무 힘들었다. 14년 동안 누워만 계시다보니, 몸피가 엄청 불었다. 조심조심 이불 위에 올린 뒤 살살 끌어서, 겨우겨우 씻겨드리곤 했다. 그래도 나중에 보면 엄마 몸에 푸른 멍 자국이 보였다. 목욕하면서 어딘가에 부딪힌 것이다. 간혹 엄마 눈에 물이 튀기라도 하면 일주일씩 눈을 못 뜨셨다. 정말 속상했다. 하지만 간병도우미를 둘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 시간은 나와 말 못하는 엄마 단 둘만의 소중한 교감시간이었다. 아무리 지방공연 갔다가 늦게 돌아오더라도 엄마를 씻겨드려야 편안하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대소변을 처리하고 기저귀를 바꿔줘야만 마음이 편안했다. 엄마는 돌아가실 때까지 등에 욕창 한번 없었다. 앞으로도 목욕차량 기증은 계속 이어가고 싶다. 별도 통장을 마련해 한 달에 500만 원씩 저축한다. 내 자신 때론 마이너스 통장으로 살 때도 있지만, 이 돈만큼은 절대 손대지 않는다. 돈이란 게 참 이상하다. 넘치면 쓸 데가 꼭 생기고, 쓰고 나면 쓸 만큼 채워진다. 더도 덜도 아닌 한 달에 딱 100만∼200만 원 정도가 남는다. 그거면 나 혼자 살기에 충분하다.”

현숙네 집은 예나 지금이나 동네 사랑방이다. 엄마 살아계실 땐 온 아파트사람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그분들은 현숙네 아파트 자물쇠 번호를 아예 외우고 있었다. 현숙이 공연하러 나가면 수시로 찾아와 어머니 말벗이 돼 줬다. 말 못하는 어머니 옆에서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거나 입에 밥을 넣어줬다.

그렇다. 현숙은 어디서나 인복이 많다. 그 주위엔 사람들이 늘 북적인다. 현숙은 코미디언 김혜영과 단짝이다. 나이는 현숙이 세 살 위지만 친자매처럼 지낸다. 키와 몸무게가 똑같아 옷도 수시로 바꿔 입는다. 대선배 가수 김상희 씨는 그를 ‘우리 꼬댕아(막내)!’라고 부르며 챙긴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송해 선생님, 조영남, 설운도, 현철, 김국환, 주현미, 하춘화, 남궁옥분, 박상민, 추가열, 탤런트 김성환, 개그맨 조영구, ‘신토불이 가수’ 배일호….

“가요계에 한때 내가 부모님 팔아 인기 챙긴다는 말이 나돌았다. 난 그 얘기를 듣고 가슴이 떨리고 앞이 캄캄해 죽고만 싶었다. 그때 하춘화 선배님이 나섰다. ‘나도 처음엔 애가 덜렁덜렁하고 가식인줄 알았는데, 수십 년 동안 지켜보니 한결같더라. 현숙은 정말 착하고 좋은 애’라고 사람들한테 말해줬다. 고마웠다. 2002년엔 어머님 팔순잔치를 열었다. 비록 말씀은 못하시고 누워계시지만 주치의선생님을 모시고 했다. 앰뷸런스 타고 미장원에 가서 머리도 손질해 드리고, 손톱도 깎아드리고, 화장도 예쁘게 해드렸다. 그때 KBS합창단 30명이 무료로 찬조출연을 해줬다. ‘나의 어머니’란 노래를 불렀는데 아마도 그 고마움은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난 여태까지 주위 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살아왔다. 더 열심히, 더 겸손하게, 더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 아직 멀었다.”  

▼ 현숙 약력 ▼

▽1959년 5월 17일 전북 김제시 월촌면 출생 ▽1979년 ‘타국에 계신 아빠에게’로 가수 데뷔

♣히트곡 ▽정말로(1980) ▽포장마차(1982) ▽건곤감리청홍백(1984) ▽사랑하는 영자씨(1995) ▽요즘 여자 요즘 남자(1997) ▽해피 데이(1999) ▽오빠는 잘 있단다(2002) ▽춤추는 탬버린(2004) ▽월화수목금토일(2006) ▽물방울넥타이(2009) ▽내 인생에 박수(2011) ▽청춘아(2013) ▽당신 만나길 잘 했어(2014)

♣가수상 ▽MBC 10대 가수상(1980∼1982) ▽KBS가요대상(1996∼2013) ▽‘요즘 여자 요즘 남자’로 방송의 날 방송대상(1997) ▽서울가요대상 특별상(1997) ▽‘오빠는 잘 있단다’로 프로듀서가 뽑은 인기가수상(2002) ▽SBS가요대전 트로트부문상(2003,04)

♣훈포장 및 사회활동 ▽어버이날 국민포장(효행연예인선정 1996) ▽저축의 날 대통령표창(2001) ▽효령대상 효행부문상(2001) ▽대한치매학회 치매홍보대사(2008) ▽삼성효행상 특별상(2009) ▽사회복지공동모금회 홍보대사(2011) ▽2018평창겨울올림픽 홍보대사(2012∼) ▽법제처 국민법제관 홍보대사(2011) ▽고액기부자모임 ‘아너 소사이어티’ 가입(2013) ▽보건복지부 치매홍보대사(2013) ▽한국어 홍보대사(2013)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현숙#고향#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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