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가까이 태권도장을 운영해 온 전밀중 관장(당시 47세)은 지난해 5월 13일 전국체전 태권도 고등부 서울시 대표 선발대회에서 지고 돌아온 아들 전모 군(18)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전 군은 그날 5-1로 앞서다 경기 종료 직전 50초 동안 경고 7개를 받아 경고패를 당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가 미웠다. “나가봐야 항상 경고 때문에 지는 태권도 따위는 그만두겠다”며 반항했다. 특정 심판의 경고 때문에 경기에서 계속 패하자, 살고 있던 인천 대신 서울에서 선수 생활을 했지만 문제의 최모 심판(47)은 서울까지 따라왔다. 하지만 이 때문에 겪은 마음고생은 아들보다 아버지가 더 컸다. 전 관장은 아들의 경기가 끝난 지 보름 뒤인 지난해 5월 28일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최○○, 너는 진짜 나쁜 놈이다”라고 적혀 있었다.
부당한 판정에 항의하며 목숨을 끊었던 전 관장이 실제로 조직적인 태권도 승부조작의 피해자였던 것으로 경찰 수사 결과 밝혀졌다. 15일 경찰청 특수수사과에 따르면 무더기 경고를 내린 심판 최 씨는 단지 ‘하수인’ 역할을 했을 뿐이었다.
승부조작의 시발점은 지방 J대 태권도학과 최모 교수(48)였다. 전 군 상대 선수의 아버지인 최 교수는 태권도 명문 D고 후배이자, 현재 D중에서 태권도를 가르치는 송모 감독(45)에게 청탁을 했다. 경기 전인 지난해 5월 초 “아들이 대학을 가야 하지 않겠나. 입상 실적이 없어 걱정이니 도와 달라”고 한 것. 소위 ‘명문대’를 가기 위해선 전국대회 1, 2위 입상 성적이 필요했다.
‘도와 달라’는 이 한마디가 전 군 등 다른 학생들이 수년간 쏟았던 땀을 모두 허사로 만들었다. 송 감독은 경기 전 서울시태권도협회 김모 전무(45)를 찾아가 “우리 D고 남자 핀급(54kg 이하) 출전 선수들을 잘 부탁한다”고 했다. 최 교수와 송 감독, 김 전무는 모두 D고 출신이었다. 경기 당일 서울시태권도협회 전무에서부터 기술심의회 의장, 심판위원장, 부위원장, 주심까지 ‘D고 핀급 챙기기’라는 청탁 내용이 차례로 전달됐다. 그 결과가 경기 막판 50초 사이에 경고 7개로 나타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돈이 오간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다. 경찰은 “청탁을 받은 인물의 계좌에 의심스러운 돈은 없었다”며 “고교 선후배라는 학연으로 얽힌 승부조작”이라고 설명했다.
태권도 관계자들은 추가 수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서울시태권도협회 부의장을 지낸 한 인사는 “승부조작이 대부분 대학 입시와 직결되는 고등부 시합에 집중되긴 하지만 전 관장 아들의 시합 같은 편파 경기는 처음”이라며 “중요한 대회 선발전에서는 금품이 오간다는 이야기도 많다”고 전했다.
경찰은 이번 승부조작에 연루된 6명 전원을 불구속 입건하고 협회 전무 김 씨에 대해서는 업무방해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김 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전 관장의 아들 전 군은 내년에 D대학 태권도학과에 입학한다. 전 군은 아버지 사망 이후 고교 상담교사의 집에서 살고 있다. 당초 태권도를 그만둘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좋은’ 지도자가 되는 것이 꿈이다.
본보 기자와 만난 전 군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이거 봐라. 내 말이 맞다. 우리 아들이 이겼다’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 군은 “(명예회복을 위해) 아버지의 실명을 꼭 밝혀 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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