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노숙인 톡톡]가정폭력, 학교 따돌림 못견뎌 거리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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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되고 싶었는데 이젠 살기가 싫어요
가난 싫어 서울 왔는데 취업사기 당해… 노숙 10년에 몸 골병, 알바로 겨우 생활

《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지하도를 차지한 주름지고 초췌한 얼굴들. 그중에는 20, 30대 청년 노숙인도 적지 않습니다. 서울역에서 노숙인 쉼터를 운영하는 드림씨티 선교회 우연식 목사에 따르면 쉼터 이용자 중 청년층 비중이 2011년 5%에서 올해는 15%까지 늘었습니다. 한창 공부하고 일해야 할 청춘들이 왜 거리에 나앉게 된 걸까요? 노숙인 봉사단체들의 도움을 받아 종각과 시청, 을지로 입구, 서울역 등을 다니며 청년 노숙인을 만났습니다. 그 가운데 4명의 심층 인터뷰를 싣습니다. 혹독한 서울 생활, 가난의 세습 같은 우리 사회 어두운 그늘의 단면이 보입니다. 》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 24세의 A 씨
“노숙이 처음은 아니에요. 무섭죠. 봉고차에 태워져 염전에 끌려가기도. 그래도 집보다 거리가 편해요.”


6월에 집에서 나왔어요. 누나가 너무 때리니까 견딜 수 없었어요. 알던 동생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싶다고 해서 그거 훔쳤다가 걸려서 교도소에 다녀왔어요.

집에 돌아오니까 누나가 막 패기 시작했어요. 망치 손잡이로 온몸을 패기도 했고 도망치면 머리카락을 잡고 질질 끌고 왔어요. 누나가 나보다 덩치도 커서 반항할 수 없었어요. 왜 때리는지 물어봐도, 그만하라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어요.

노숙이 처음은 아니에요. 예전에도 몇 번 집을 나온 적이 있긴 했어요. 초등학교 6학년 때 엄마가 정신병원에 가둬 버리려고 했어요. “너 같은 건 정신병원에 있어야 해!”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엄마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어요. 집이 싫었어요. 학교도 싫었어요. 중학교 때는 애들한테 따돌림도 당하고 엄청 맞았어요.

사실 길거리 생활은 정말 위험해요. 어느 밤에는 사람들이 나를 억지로 봉고차에 태워서 염전으로 끌고 갔어요. 재혼을 한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어요. 길거리에서 알게 된 형은 술만 취하면 칼질을 해요. 날 죽여 버리겠다고 쫓아온 적도 있었어요. 경찰에 전화해도 내버려 두래요. 그래도 집보다 길거리가 편해요. 집에 가면 누나가 다시 나를 때릴 것 같아서 못 가요.

목사가 돼서 힘든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었어요. 지금도 노숙인 할아버지들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돈을 많이 벌어서 그분들을 도와주고 싶기도 해요. 하지만 그냥 죽고 싶을 때도 많아요. 친구도 없어요. 여자친구를 사귄 적도 있었지만 술 취한 친구랑 오토바이를 타다가 사고로 죽었어요. 내 옆에는 아무도 없어요. 센터 선생님들이 도와준다고는 하지만, 그 선생님들도 내가 못하면 괴롭히고 혼낼 것 같아요. 더 좋아질 것도 없을 것 같은데…. 그냥 살기가 싫어요.

○ 29세의 B 씨
“매일 인력소개소 가지만 일자리 구하기 점점 더 어려워. 당장 오늘 밤엔 어디 가서 자나 한숨만 나와요.”
노숙 생활 한 지 10년이 다 돼 가네요. 성적이 안 좋아서 대학은 꿈도 못 꿨죠. 일자리를 구하려고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서울에 올라왔어요. 아직까지 제대로 된 일자리를 못 구하고 있어요. 노력? 다 해 봤습니다. 안 되더라고요.

좀 좋은 직장을 구하려면 다 돈이에요. 대학은 엄두도 못 내요. 학원 수강료에 생활비 대려면 일해야 하는데, 그러면 공부할 시간이 없어요. 기술 배우려고 직업학교를 다닌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수당으로 한 달에 30만 원 주더라고요. 그 당시에 고시원 살았는데 방값만 15만 원이에요. 직업학교 다니면 알바를 못 해요. 알바 하면 요즘에는 4대보험 들어 준다는데, 그러면 실업자가 아니라서 지원이 끊겨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취직을 했었어요. 사장이 월급도 안 주고 도망쳤죠. 생활비가 없어 노숙 생활을 시작했어요. 지방을 전전하기도 했죠. 땅바닥에서 자다 보니 디스크가 왔어요. 그때부턴 돈 많이 주는 힘든 일을 할 수가 없었어요. 치료받고, 편의점 아르바이트 하면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어요. 디스크가 나으니까 또 다른 데가 아팠어요. 그러면 몸 추스르느라 일 못 하고….

서울로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어요. 돈? 당연히 없어요. 고시원은 꿈도 못 꿉니다. PC방이나 찜질방에서 자요. 하루 종일 인력소개소에서 일을 기다려요. 가끔은 무료 급식소 배식 시간을 놓치기도 해요. 그럼 밥을 사 먹어야 하는데, 한 끼에 싸 봤자 6000원이에요. 일거리가 매일 있으면 다행인데, 공치는 날이 더 많아요. 그럼 하루 일당 7만 원으로 2, 3일을 살아야 해요.

일을 해라, 돈을 모아라. 말들은 참 쉽게 해요. 이런 상황에 처해도 그런 말이 나올까요? 이제 나이도 들어서 일자리 구하는 게 갈수록 어려워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장 오늘 밤에 어디로 가야 할까요? 한숨만 나오네요.

○ 38세의 C 씨
“아버지 사업 부도로 가족이 풍비박산. 가족이 다시 모일 수 있다는 희망이 삶의 유일한 이유입니다.”
24세 때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후 줄곧 노숙 생활을 했어요. 그때 아버지 사업이 망해 20억 원이 넘는 빚이 생겨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거든요.

사회가 이렇게 무섭고 냉정한 곳인 줄 꿈에도 몰랐어요. 사실 저는 전과가 있어요. 여동생 남자친구가 동생한테 안 좋은 짓을 했어요. 그런데 사과도 안 하고 발뺌만 하니까 화가 나서 때렸죠. 어쩌다 급소를 때리게 됐는데, 결국 폭행죄로 감옥을 다녀왔어요.

빨간 줄이 생기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편의점 주인은 “아무리 아르바이트이고 보증인을 둔다고 해도 욱해서 사람 패면 어떻게 할 거냐”며 거절하더군요. 조리사 자격증도 있었는데, 중국집에서는 칼 있는 부엌에서는 일 못 시킨다고 했어요. 다들 서류를 보다가 빨간 줄이 있으면 말도 안 하고 그냥 나가 버리더라고요. 아무도 왜 감옥에 다녀왔는지도 묻질 않아요. 그나마 영화나 드라마 촬영장 엑스트라 일은 항상 사람이 모자라니까 뭐라 물어보질 않아요. 그러니 그것밖에 할 일이 없는 거죠.

내가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가족 때문이었어요. 아버지가 저한테 이렇게 말했어요. “남한테 피해를 주면 대대손손 손해를 본다. 내가 책임을 질 테니까 너희가 나 좀 도와줘라.”

그러니 포기할 수 없었어요. 엑스트라 일하고 또 쉬는 날에는 고물을 주워요. 생활비도 거의 안 써요. 밥은 무료 급식소서 해결하고 잠도 쪽방이나 거리에서 자요. 그렇게 모아서 집에 보내요.

아버지도 경비를 하고 계시고요. 이제 빚도 많이 갚았어요. 노숙 생활을 하면서 가족들 얼굴을 못 봤어요.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고 동생은 친척 집에 있어요. 빚 다 갚으면 가족들하고 얼굴 보면서 그동안 못 했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바라는 건 그것밖에 없어요.

○ 32세 D 씨
“봉사단체의 도움으로 자립 위한 첫발을 내딛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다른 노숙인의 자활을 돕겠습니다.”
새아버지가 도박과 술에 빠졌어요. 돈을 다 거기에 쏟아 부어 집에 돈이 없었죠. 그래서 대학도 못 갔어요. 일을 알아봤는데, 고졸이라 번듯한 데는 갈 수도 없겠더라고요. 나름대로 직업학교 다니면서 기술도 배운 덕분에 대형매장에서 물건 정리하는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성실히 일했어요. 돈도 어느 정도 모았죠. 그런데 새아버지에게 다 빼앗겼어요. 나중에 어머니가 이혼했지만 이미 빼앗긴 돈을 어떻게 찾아요? 임대주택 월세를 내지 못해 지난해 12월 거리로 쫓겨났죠.

노숙 생활을 하면서 가장 간절했던 건 일자리였어요. 돈을 벌어야 길거리 생활을 끝낼 수 있으니까요. 시에서 소개해 주는 공공근로도 했지만 한 달에 많아 봤자 30만 원밖에 되지 않았어요. 제대로 된 일자리를 갖고 싶었지만 노숙인이 일하기는 쉽지 않았어요. 주민등록증은 잃어버렸고 요금 미납으로 휴대전화도 없고. 게다가 주거지도 불분명했죠. 그러니까 직장에서 면접 보라고 연락조차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노숙인에 대한 편견도 심해요. 사실 노숙인들이 회사에서 오래 못 버티기는 해요. 길어 봤자 일주일 정도? 그러니까 회사들이 노숙인이라고 하면 피해요. 전 정말 열심히 일하고 싶은데, 이력서를 넣어도 면접 보자는 연락은 단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 저에게 희망을 준 건 노숙인을 위한 봉사 단체인 ‘거리의 천사’들이었어요. 여기 팀장님이 빅이슈(노숙인 자활을 돕는 사회적 기업)를 소개해 주셨고 6월부터 일하게 됐어요. 이 일을 시작하면서 노숙 생활은 그만두고 고시원에 들어갔어요. 적금통장에 돈도 차곡차곡 모으고 있고요. 이제 몇 년간 여기서 일을 해서 임대주택을 구하면 교육도 받아서 다른 직장을 얻을 거예요.

지금은 봉사활동도 다녀요. 다른 노숙인들한테 일어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노숙인을 위한 사회적 기업 홍보도 하고요. 이런 단체들이 더 널리 알려지고 또 더 많이 생겨야 노숙인도 일하고 싶어 하고 또 열심히 일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들 편견도 없어질 테고, 노숙인도 일자리를 얻어 자립할 수 있지 않겠어요?

오피니언팀 종합·박승민 인턴기자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졸업
#청년 노숙인#가정폭력#가난#인력소개소#일자리#봉사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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