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냉이 먹고 12시간 노동…폴란드의 삶이 생각납니다”

  • 동아닷컴
  • 입력 2014년 9월 21일 10시 12분


폴란드로 갔다 귀국 6·25 북한 고아들 스승에게 보낸 편지 39통 발견



사진제공 홍인택
사진제공 홍인택

6·25전쟁 직후인 1953년 7월 말부터 59년 7월 말까지 6년 동안 폴란드 남서부 작은 마을의 한 학교로 보내졌던 북한 전쟁고아 26명이 귀국 후 폴란드 교사 2명에게 보낸 편지 39통이 발견됐다. 편지에는 동족상잔 와중에 부모를 잃고 어린 시절을 외국에서 보낸 기구한 사연과 이들 눈에 비친 전후 재건 시기 북한 사회의 표정이 담겨 있다.

이 편지들은 미국 냉전사 연구기관인 우드로윌슨센터 북한국제문서연구프로젝트(NKIDP)의 홍인택 연구인턴이 지난해 폴란드 현지조사를 통해 발굴, 8월 27일 미국 학계에 공식 발표했다. 홍인택 연구인턴은 미국 미네소타 주 칼턴칼리지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사랑하는 에드워드 선생님. 파란(폴란드)에 있을 때 학교식당에 항상 나왔던 라드(돼지기름)를 잘 안 먹었던 게 후회스러워요. 저희 조선(북한)에서는 라드를 찾을 수가 없어요. 도무지 기름진 것을 먹을 수가 없답니다.”
“돼지기름 안 먹었던 것 후회”

6·25전쟁 직후 폴란드에 갔던 북한 전쟁고아들이 귀국 후 폴란드 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사진제공 홍인택
6·25전쟁 직후 폴란드에 갔던 북한 전쟁고아들이 귀국 후 폴란드 교사들에게 보낸 편지. 사진제공 홍인택


1960년 2월 14일. 북한 평양고등석탄공업전문학교에 다니던 오○○ 군은 몇 달 전까지 폴란드에서 자신을 부모처럼 돌봐줬던 에드워드 제드랄 선생에게 음식을 골라먹었던 자신을 반성하는 편지를 보냈다. 6·25전쟁 당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오군은 전쟁이 끝난 53년 폴란드 고아원으로 보내졌고, 59년까지 만 6년간 생활했다. 전후 아직 복구가 끝나지 않은 고향으로 돌아와 만난 첫 번째 현실은 극심한 가난이었다.

“지금 제가 있는 학교에서는 조금이라도 고기를 먹어본 적이 없어요. 심지어 명절이나 공휴일에도 고기를 안 준답니다. 저희는 보통 강냉이(옥수수)를 많이 먹어요. 폴란드에서도 옥수수를 먹나요? 이게 저희 조국(fatherland)에서의 삶입니다.”

부족한 것은 음식만이 아니었다. 학생들은 누런 갱지 노트를 뜯어 쓴 편지에다 사전이나 공책, 만년필 같은 학용품은 물론이고 자주 편지를 보낼 수 있게 우표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절실했던 것은 외부 세계 소식이었다. 김일성 독재체제가 강화되고 정보에 대한 통제가 가해질수록 그들은 폴란드에서 맛봤던 바깥세상에 대한 시원한 정보를 갈망했다.

“로마에서는 올림픽이 한창 열리고 있겠네요. 선생님! 폴란드에서 보던 스포츠 잡지를 좀 보내주시겠어요. 여기서는 바깥세상 소식을 전혀 들을 수 없거든요. 스포츠 잡지가 없으면 그냥 청년잡지(Sztandar Mlody)라도 좋아요.”

폴란드에 있을 때부터 스포츠광이었던 김○○ 군(강계고등전기학교)은 같은 해 9월 29일 쿨리베르다 스타니슬라우 선생에게 제17회 로마올림픽 소식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림을 잘 그렸던 한 남학생은 “선생님이 지금 가르치는 폴란드 여학생 몇 명의 주소를 알려주시면 안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녀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폴란드어를 연습할 수 있을 테니까요”라고 말한 그 역시 답답한 북한 사회주의 밖으로 난 유일한 창을 붙들고 싶은 마음이 역력했던 듯하다.

1959년 귀국 직전 고아들의 모습을 담은 기념앨범(위)과 북한 ‘조선민주여성동맹’이 고아원 교사들에게 전한 사은 깃발. 사진제공 홍인택
1959년 귀국 직전 고아들의 모습을 담은 기념앨범(위)과 북한 ‘조선민주여성동맹’이 고아원 교사들에게 전한 사은 깃발. 사진제공 홍인택

전쟁 통에 부모를 잃고 이역만리 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들이 다시 고향에 돌아와 보낸 편지 안에는 전후 복구를 넘어 김일성 독재체제로 치닫던 북한 사회주의의 사회상이 간간이 녹아 있다. 북한 당국이 갓 귀국한 아이들에게 당과 수령에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특유의 의식화 교육을 펼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도 드러난다. 1960년 8월 15일 광복절을 앞두고 한 학생이 쓴 편지가 대표적이다.

“일본에서 독립한 이후 조선은 미국과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앗아갔고 우리는 그것을 재건하는 데 여념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아주 빠르게 많은 것을 세웠습니다. 높은 하늘 아래 공산주의라는 탑을 세울 겁니다. 우리 당과 김일성 수령 동지가 이끌고 있지요. 우리의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어요.”

빡빡한 사회주의 교육과 근로봉사 활동에 동원돼야 했던 팍팍한 삶이 그들의 향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희는 3월 27일 평양 공사장 현장에 투입됐어요. 엄청나게 큰 돌을 옮겼어요. 5월 16일엔 더 많이 옮겨야 할 거예요. 잠도 못 자고 36시간이나 일했답니다. 하루에 가장 조금 일한 것이 12시간입니다. 여기서 힘들수록 폴란드의 삶이 더욱 생각납니다.”(날짜와 이름이 정확지 않은 한 남학생의 편지)

서구식 ‘보살핌’과 팍팍한 삶

편지 대부분은 이처럼 ‘폴란드에서는 좋았는데 이곳에서는 힘들다’는 문장이 주를 이룬다. 홍인택 연구인턴은 “6·25전쟁 고아들에게 폴란드 선생님들은 ‘보살핌(care)’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부모 이상의 존재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국가들은 궁극적인 국가 정체성 재확립에 앞서 전쟁에 시달린 개인들의 심리적 안정을 우선시하는 교육에 힘을 쏟았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 홍인택 연구인턴은 “고아들은 당과 국가에 대한 개인의 헌신과 복종을 강조하는 북한 사회에서 사춘기를 보내는 동안 개인 사이의 감정적 교류를 강조하는 서구식 보살핌의 가치를 새삼 깨달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신석호 동아일보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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